HERI 칼럼

내 돈에 꼬리표가 달려 있다면?

HERI 2021. 07. 01
조회수 2079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네덜란드 트리오도스·독일 지엘에스 등
고객에 투자처 묻거나 공익 창출 분야에만 투자

사회적 가치 중시하는 40개국 65개 ‘착한 은행’
경제·사회·환경 지속가능성 고민하며
윤리적 금융 생태계 구축

여윳돈이 생겨서 은행에 예금하러 갔다고 하자. 아마 당신은 이자가 얼마인지가 중요할 뿐, 은행에 맡긴 돈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은행은 당신의 돈을 차입(借入)했고, 그 대가로 비용(이자)을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당신이 맡긴 돈은 이제 은행 소유이고 더는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만일 당신이 맡긴 돈이 석탄 발전소를 짓는 데 사용되거나 전쟁무기를 만드는 자금으로 쓰인다면 어떨까. 내가 맡긴 돈이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에 사용되거나 제3세계 가난한 생산자를 위한 공정무역(fair trade)에 투자된다면 만족스럽지 않을까.

돈은 꼬리표를 달고 있지 않아서 내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한 방법이 있다. 좋은(good) 일에 투자하는 착한(good) 은행에 돈을 맡기면 된다. 그런 곳이 있을까? 있다. 그리스어 트리오도스(tri+hodos, 3개의 길)를 은행 간판에 새겨넣고 사람·환경·이익(people·plane·profit)이라는 3가지 핵심가치를 추구하는 네덜란드 트리오도스(triodos) 은행은 친환경, 공정무역, 소액금융 등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에만 투자한다. 트리오도스는 출범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손실을 낸 적이 없다. 사회와 생태,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지속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의 지엘에스(GLS), 캐나다의 벤시티(vancity), 미국의 뉴리소스(NRB), 이탈리아의 방카에티카(Banka Etica) 등도 착한 은행이다. 대출심사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지엘에스 은행은 나쁜 사업엔 절대로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유기농 사업, 재가 요양, 실업자 구제, 건강식품 판매, 공동주택 건설 등 사회와 환경에 도움이 되는 일에만 투자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은행 자금 유·출입을 100% 공개함은 물론, 예금 고객들에게 돈을 어디에 투자했으면 좋겠는지를 직접 묻는 등 예금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은행으로 유명하다. 방카에티카는 비영리단체와 사회적 경제 기업 등 제3섹터에서 활동하는 조직들을 위한 은행이다. 영리기업보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조직에 자금을 제공해도 은행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모든 거래는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철학에 따라, 대출 희망자가 하려는 사업이 은행이 정한 금지 규정에 해당하는지를 엄밀히 살핀 후 대출을 실행한다.

2021년 6월 현재 GABV 65개 은행 분포 지도. 자료: gabv.org
2021년 6월 현재 GABV 65개 은행 분포 지도. 자료: gabv.org

착한 일을 하는 은행들이 연대하여 만든 협력기구인 ‘GABV’(global alliance for banking on values)도 있다. 40개 나라, 65개의 착한 은행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금융이 사회와 경제, 환경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돕는 도구로 활용돼야 한다는 가치를 공유한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오이시디(OECD) 국가는 물론 나이지리아, 네팔, 방글라데시 등 가난한 나라의 은행들도 많다.

우리나라 은행 중 이곳에 가입한 곳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없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인 나라에서 사회·환경적 가치를 실천하는 윤리적 은행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나라 살림살이(GDP)가 커지는 게 능사가 아니다. 아시아의 금융허브를 꿈꾸기 전에 금융의 참모습을 갖추는 게 먼저다.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은 돈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인다. 가난한 이들의 등골을 빼먹고, 빈부 격차를 키운다.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일에도 흘러들어 간다. 여기엔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금융회사가 자리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은행과 거래하고 싶은가.

문진수 서울신용보증재단상임이사

한겨레에서 보기: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기능차별 어려워진 스마트폰 성숙기 새 경쟁

스마트폰은 디지털 세상의 풍경을 바꾼 혁신의 상징이다. 2007년 아이폰 이후 스마트폰 업체들은 해마다 새 모델을 통해 혁신 경쟁을 벌여왔고, 기술과 보급률은 빠르게 올라갔다. ‘생필품 스마트폰’은 어떠한 차별화를 지향할...

  • HERI
  • 2021.08.23
  • 조회수 1856

[말 거는 한겨레] 한국언론과 ESG 경영 / 이봉현

기후환경 분야 정상회의로 5월 말 열린 ‘2021 피포지(P4G) 서울 정상회의’에 깜짝 등장한 ‘김갑생할머니김’의 이에스지(ESG) 경영 선포 영상. 시가 총액 500조원, 코스피 1위의 가상기업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은 기...

  • HERI
  • 2021.08.18
  • 조회수 1724

사회적경제 기업은 비옥한 금융 생태계에서 자란다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신생 기업 저비용 자금 조달받는 ‘메자닌 금융’처럼 사회적경제 기업 성장할 수 있는 임팩트 투자 늘려야 사회 투자자에 인센티브 주거나 기업 수익 일정 부분 사회 투자 강제하는 법 등 정...

  • HERI
  • 2021.08.12
  • 조회수 1564

‘촉매 자본’으로 금융사에 ‘넛지 전략’ 펼치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금융소외 계층 구제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듯 사회·환경 가치 큰 사업 위한 촉매기금 조성 필요 사회적 가치 창출 무관심한 금융사에 인내 자금 제공해 더 나은 사회 위한 협력 파트너십...

  • HERI
  • 2021.07.29
  • 조회수 2005

[유레카] 비운의 브로드피크 / 구본권

8000m대 봉우리 14좌 중 사람 발길에 너그러운 곳은 없다. 한국인 최초로 14좌에 오른 박영석 대장이 2011년 숨진 안나푸르나1봉(사망률 25%)을 비롯해, 등반 사망률이 10~20%를 넘는 곳이 숱하다. 파키스탄-중국 경계를 이루는 ...

  • HERI
  • 2021.07.28
  • 조회수 1966

[말 거는 한겨레] “현장에 가봤어?” / 이봉현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지난달 말 사퇴한 김기표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 2017년 매입해 보유하고 있던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의 토지. 도로가 바로 앞에서 끊겨 건축이 가능하지 않은 ‘맹지’이지만, 주변의 개발 상황 등을 면밀...

  • HERI
  • 2021.07.22
  • 조회수 1819

[유레카] 해고된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 / 구본권

로봇이 실험실을 나와 영업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바리스타 로봇, 서빙 로봇, 안내 로봇이 속속 배치되고 있다. 인건비 절감과 서비스 효율화를 내거는 만큼 일자리 불안이 뒤따른다. 일본 소프트뱅크 로보틱스는 2014년 휴머노...

  • HERI
  • 2021.07.20
  • 조회수 1956

우리도 독일처럼…‘에너지 은행’ 정부가 나서서 만들면 어떨까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독일, ‘에너지 전담 은행’ 통해 신재생 에너지 정책 실행에 앞장 서 ‘기후악당’ 국가 선정된 한국도 은행 설립 등 적극적 전략 마련해야 독일재건은행 누리집 (www.kfw.de) 은퇴한 60대 부부가...

  • HERI
  • 2021.07.15
  • 조회수 2225

내 돈에 꼬리표가 달려 있다면?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네덜란드 트리오도스·독일 지엘에스 등 고객에 투자처 묻거나 공익 창출 분야에만 투자 사회적 가치 중시하는 40개국 65개 ‘착한 은행’ 경제·사회·환경 지속가능성 고민하며 윤리적 금융 생태계...

  • HERI
  • 2021.07.01
  • 조회수 2079

[유레카] 알고리즘 인식과 인간 인식의 차이 / 구본권

퇴사율은 기업 생산성과 직결되는 만큼, 기업은 채용 때 오래 근속할 직원을 선호한다. 미국의 사무기기 업체 제록스는 퇴사율을 낮추기 위해 퇴직 가능성이 높은 구직자를 알려주는 소프트웨어를 도입했다. 분석결과 통근 거리...

  • HERI
  • 2021.06.30
  • 조회수 1911

[말 거는 한겨레] 왜, 이준석을 내려놨나 / 이봉현

최근 이준석의 국민의 힘 대표 당선이 갖는 의미를 분석한 한겨레 티브이 <논썰> 프로그램 화면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30대 당대표 이준석은 한국 정치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준석 현상’에 주목하는 언...

  • HERI
  • 2021.06.28
  • 조회수 1680

“관계금융 실현하는 지역밀착 공공은행 만들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신용정보 낮은 청년, 매출실적 낮은 성장 잠재력 있는 기업은 기존 금융에서 금융 서비스 이용 어려워 도약 어려운 악순환 지역에 뿌리내리고 정성적 정보 종합판단하는 관계금융 절실 지역밀착...

  • HERI
  • 2021.06.17
  • 조회수 2047

“동의없는 이용자 추적 차단” 인터넷 서비스 대세될까?

애플 ‘프라이버시 강화안’ 파장 이용자 90% ‘앱 추적 차단’ 선택 “이용자식별 관뚜껑 못질한 셈” 애플 선공에 인터넷 사업모델 흔들 페이스북 ‘반발’, 구글은 ‘따라하기’ ‘초기설정’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정보주체...

  • HERI
  • 2021.06.14
  • 조회수 1870

SNS ‘사진 태그’ ‘위치정보’는 해커의 ‘먹이’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 링크 스크랩 프린트 글씨 키우기 보이스 피싱을 막기 위해 홍보를 강화하고 은행 출금 때 다양한 안전장치를 거치도록 하고 있지만, 메신저 피싱은 오히려 늘고 있다. 지난해 가족·지인을 사칭한 메신저...

  • HERI
  • 2021.06.14
  • 조회수 1572

[유레카] ’메타버스’의 무한성과 유한성 / 구본권

‘메타버스’는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 닐 스티븐슨이 1992년 <스노 크래시>에서 ‘아바타’와 함께 처음 사용한 말인데, 최근 널리 쓰이고 있다.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를 합성해 만든 ‘메타버스...

  • HERI
  • 2021.06.10
  • 조회수 2227

“사회적 경제에 금융을 흐르게 하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혹독한 경제상황 속에 싹틔운 따뜻한 금융 돈이 위기 극복하고 지역 번영에 기여해야 다양한 사회적 경제 형태 품을 수 있는 금융 사회적 금융 중개기관과 도매기금 역할 중요 언스플래쉬 일반...

  • admin
  • 2021.06.03
  • 조회수 2024

“정책 효과성 높이려면 공적집단의 소명의식 회복해야…”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훌륭한 정책과 정부의지 높아도 실현은 난항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에 ‘포획’된 공적집단 합종연횡하며 정책결정이나 실행 연기되기도 실행 난항 극복하고, 실행 효과성 높이려면 경제·사회 전반 고려...

  • HERI
  • 2021.05.31
  • 조회수 2117

‘사이버 인질극’이 바꿀 인터넷 구조

[유레카] 신종 인질극이 잇따르고 있다. 범인들은 인질극 몇시간 만에 수십억원의 몸값을 챙겨 흔적 없이 사라진다. 지난 7일 미국 동부지역 석유 공급의 45%를 담당하는 송유관 운영회사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은 해커 집단 ‘다...

  • HERI
  • 2021.05.24
  • 조회수 1919

애플 에어태그 ‘위치추적’ 실시간 미행·스토킹 우려

애플이 4월30일 개당 3만9000원에 출시한 위치추적용 액세서리 에어태그. 애플 제공 “열쇠를 어디 뒀더라” 더이상 건망증을 탓하지 않게 만들 똑똑한 위치알리미가 등장했다. 애플은 지난달 30일 위치 추적용 소형 액세서리 ‘...

  • HERI
  • 2021.05.17
  • 조회수 2290

[말 거는 한겨레] 언론 바우처, 실험해 보자 / 이봉현

의 후원 페이지. 월 10달러의 정기적인 후원을 권하고 있다. 가디언은 디지털 콘텐츠를 유료화하는 대신 질 높은 뉴스로 독자에게 만족감을 줘서 후원을 받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100만명 이상의 후원회원을 모집했다. ...

  • HERI
  • 2021.05.10
  • 조회수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