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유레카] 반복지 재정포퓰리즘 / 이창곤

HERI 2019. 12. 03
조회수 4404

재정(public finance)이란 말은 라틴어의 ‘법정 판결로 결정한 벌금(fine)’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선 15세기 국왕이 부리는 조세징수 청부인을 지칭했고, 독일에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오늘날 나라살림을 의미하는 재정은 두 개의 돈주머니, 즉 예산과 기금으로 꾸려진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은 513조5천억원이다. 지난해에 견줘 9.8% 오른 수치다. 국회는 예산안 심의를 법정 시한인 2일까지 끝내야 했지만 올해도 스스로 법을 어긴 꼴이 됐다. 졸속 심의는 불가피하다.

예산안 관련 논란 가운데 또 하나 걱정스러운 것은 ‘재정 포퓰리즘’ 담론이다.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초슈퍼 예산” “재정 중독” “재정 포퓰리즘”이란 주장이 그렇다. 이 프레임은 해묵은 ‘재정건전성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개발연대 재정 패러다임’과 뿌리가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총지출 비율을 살펴보자. 2018년 기준 오이시디 국가의 평균은 40.1%다. 그러나 한국은 기껏 31.5% 수준에 그친다. 우리의 재정 규모는 ‘초슈퍼’가 아니라 ‘슈퍼 예산’이라 칭하기에도 겸연쩍다.

한국은 전형적인 ‘저부담-저복지 국가’다. 한국이 진정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면 재정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정부를 비판해야 할 지점은 증세나 사회보험료 인상 등 재정 확충을 위한 노력을 왜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가, 내년도 예산 구성은 과연 적절한가 등일 것이다.


재정 포퓰리즘은 반복지 담론인 복지 포퓰리즘과 쌍생아다. 복지 때문에 재정건전성이 붕괴했으며, 특히 “현금 꽂아주는 복지 포퓰리즘 때문에 재정이 파탄났다”는 주장이다. 재정의 궁극적 목표는 돈이 아니다. 삶의 질 향상, 즉 시민의 행복이다. 복지는 이를 달성할 핵심 정책 및 사업이다. 더욱이 우리는 저출산 고령화, 4차 산업혁명, 불평등 악화 등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려면 확장 재정과 그 전략적 배분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중장기적으로는 재정지출의 건전성 확보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이창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goni@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919348.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칼럼] 문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재정정책: 재정이 장벽이 아닌 마중물이 되려면

문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재정정책 : 재정이 장벽이 아닌 마중물이 되려면   * 칼럼 내용은 아래 자료 첨부

  • HERI
  • 2020.01.13
  • 조회수 4009

[유레카] ‘국가 미래비전’의 쓸모 / 이창곤

우리나라에서 국가 차원의 중장기 미래비전이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미래학회가 함께 만든 <서기 2000년의 한국에 대한 조사연구>를 그 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초점은 과학기술...

  • HERI
  • 2019.12.26
  • 조회수 4184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정과 평등이 충돌할 때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얼마 전 만난 공공기관 노조위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난달 9일 전태일 열사 49주기에 열리는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여를 독려했더니, 젊은 조합원 여럿이 ...

  • HERI
  • 2019.12.20
  • 조회수 4869

[유레카] 반복지 재정포퓰리즘 / 이창곤

재정(public finance)이란 말은 라틴어의 ‘법정 판결로 결정한 벌금(fine)’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선 15세기 국왕이 부리는 조세징수 청부인을 지칭했고, 독일에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오늘날 나...

  • HERI
  • 2019.12.03
  • 조회수 4404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여론조사 불신, 언론도 공모자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여론조사 신뢰도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수상한’ 여론조사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한 언론사의 기사가 발단이 됐다. 특히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

  • HERI
  • 2019.11.25
  • 조회수 4555

[유레카] ‘개혁과 권력의 시계추’ / 이창곤

“짐승들조차 쉴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기나 햇빛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로마공화정 시대, 대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다 죽임...

  • HERI
  • 2019.11.11
  • 조회수 4270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울분사회 한국, 지속가능한가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울분사회’,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새로운 수식어다. 한국인의 43.5%가 만성적인 울분 상태이며 심한 울분을 기준으로 하면 독일의 4배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 HERI
  • 2019.10.25
  • 조회수 4784

[유레카] 화석연료 없는 복지국가 / 이창곤

2019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청소년을 꼽으라면 아마도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2019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선보인 그의 연설은 압권이었다. ...

  • HERI
  • 2019.10.16
  • 조회수 4550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촛불을 들지 못한 20대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소위 ‘조국 사태’ 이후 20대 청년세대의 박탈감과 분노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일부 명문대생들은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며 촛불을 들었다. 보수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 HERI
  • 2019.09.27
  • 조회수 4557

[유레카] ‘조국 논란’의 종착점 / 이창곤

‘조국 논란’의 끝은 어디인가? 언론 보도는 연일 차고 넘친다. 하지만 공론(公論)은 없다. 검찰 수사는 마침내 ‘자택 압수수색’으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장관과 직접 연계된 객관적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지와 ...

  • HERI
  • 2019.09.25
  • 조회수 4736

[유레카] 절실한 정책결정의 ‘관제탑’/ 이창곤

대부분의 공항에는 컨트롤타워, 즉 관제탑이 있다. 관제탑의 허가 없이는 어떤 비행기도 뜨고 내릴 수가 없다. 관제탑은 항공기의 위치와 고도를 확인해 필요사항을 지시한다. 비행 전에는 조종사가 제출한 비행계획을 점검하고 ...

  • HERI
  • 2019.09.03
  • 조회수 4660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조국 정국’ 독해법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조국 정국’이 심상치 않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혹이 태풍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 출범 과정에서 조 후보자가 지니는 상징성이 큰 탓에 핵심...

  • HERI
  • 2019.08.23
  • 조회수 4374

[유레카] 유라시아 ‘철의 실크로드’ 시대/이창곤

실크로드, 즉 비단길은 독일의 한 지리학자가 고대 중국과 그리스·로마 문화권 사이의 교역이 주로 비단을 통해 이뤄졌다는 데 착안해 명명했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동양사)는 이 용어는 ‘비단길들’로 복수형으로 써야 더 역...

  • HERI
  • 2019.08.19
  • 조회수 4050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노회찬 없는 진보정치의 미래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2004년 4월15일은 한국 진보정치사에서, 아니 한국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시작됐다. 민주노동당이 총선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을 얻어 ...

  • HERI
  • 2019.07.26
  • 조회수 3686

[유레카] ‘시민연대’로 새 한-일 관계 물꼬를/ 이창곤

일본의 경제보복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언론엔 연일 분석과 논평이 쏟아지지만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며, 그는 어디까지 밀어붙이려 하는가? 정부는 왜 ...

  • HERI
  • 2019.07.18
  • 조회수 3859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다시 '문재인의 시간'이 올까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6개월은 ‘황교안의 시간’이었다. 2017년 탄핵사태 이후 줄곧 10%대에 묶여 있던 자유한국당 지지도가 1월 20%대로 급등한 데에는 황 대표의 역할이 컸다. 그가 등장하자 문재...

  • HERI
  • 2019.06.28
  • 조회수 3662

[유레카] 한국 ‘사회복지 역사’ 소고 / 이창곤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이 없는 민족을 낳을 것이며, 정신이 없는 나라를 만들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 이것이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네 역사며 내...

  • HERI
  • 2019.06.26
  • 조회수 8810

[유레카] ‘소리 없는 아우성’ / 이창곤

사회관계에서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사람들이 대응하는 방식은? 또는 어떤 조직이나 회사가 내리막길로 추락할 때 조직원들의 선택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의 저자인 앨버트 허시먼의 개념을 원용하면 셋으로 나눌 수 있...

  • HERI
  • 2019.06.04
  • 조회수 4509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청년을 퇴사로 밀어내는 사회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청년 퇴사는 시대적 변화를 드러내는 사회 현상이다. 무엇보다 청년층의 첫 직장 평균 근속기간이 1년 5.9개월에 불과하고,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도 27.7%에 이른다는 수치...

  • HERI
  • 2019.05.31
  • 조회수 4631

[유레카] 위기의 ‘사회적 대화’ 살리기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를 두고 말들이 많다. “입법보조기구냐” 또는 “고충처리기구 아니냐”는 비아냥은 차라리 충고에 가깝다. 사회적 대화 위기론을 넘어 무용론까지 등장하는 마당이다. 민주노총의 불참에 ...

  • HERI
  • 2019.05.13
  • 조회수 4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