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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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근년 한국 사회를 달군 가장 뜨거운 열쇳말 중 하나는 공정성이다. 정유라의 이대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문재인 정부 출범을 이끈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공정성 실현의 기대를 받고 출범한 이 정부의 노력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주춤하고 있다.


12년 전 해고된 케이티엑스(KTX) 승무원들의 복직 기사에는 ‘떼를 쓰면 복직이 된다’는 불만이 폭주한다. 기간제 교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등의 정규직화 추진에 대해서도 정규직은 물론 청년들까지 ‘역차별’이라며 거세게 반발한다. 정규직이 되려는 자, 시험을 거치라는 반발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핵심 기제는 시험이다.

오해하지 말자. 한국인이 비정규직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 한국리서치가 지난 3월 발표한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 보고서’를 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실력 차이 아니다’라는 문항에 62%가 공감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이 정당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에 대한 공감 55%보다 높다. 즉 한국인 다수는 비정규직이 실력이 떨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실력은 시험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최후통첩 게임을 변형한 흥미로운 실험이 소개되었다. 먼저 시험을 치르게 하고 고득점자가 제안자가 되게 했다. 원래의 최후통첩 게임에서는 대부분 제안자와 응답자가 5 대 5로 돈을 나눠 갖는다. 제시액은 제안자 마음대로지만, 응답자가 제시액을 거절하면 둘 다 한 푼도 못 받기 때문이다. 통상 인간의 선택에서 자기 이익보다 공정성이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자 제안자는 더 많은 액수를 가졌고 응답자도 순순히 따랐다. 시험 하나로 제안자와 응답자 모두 더 불평등한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다.

<시험국민의 탄생>의 저자 이경숙은 시험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탁한 서열화 장치라고 말한다. “각고의 노력으로 시험의 난관을 돌파한 승자들은 어렵게 얻은 서열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고, 시험은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앞의 한국리서치 보고서를 보면 ‘능력과 노력에 따른 보수의 차이는 클수록 좋다’는 문항에 무려 66%가 공감을 표했다.

요컨대 시험과 같이 객관적인 차별 규칙이 확보된다면 보상의 차별은 클수록 좋다는 것이 지금 한국인 다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숙명여고 쌍둥이 답안지 유출 사건에 대한 분노도, “학종 폐지, 수능 100%”, “로스쿨 폐지, 사법시험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도 같은 맥락이다. ‘서연고서성한’ 등 대학 이름 앞 글자를 따서 서열을 만들고, 그 순서를 두고 싸운 지가 오래다. 서열화된 대학 시스템 자체의 불공정성을 따지는 목소리는 묻혀가고 있다.

서열을 짓고 차별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는 주장도 있다. 본능인 이상 받아들이고 공정한 차별 규칙을 정하자는 말인 듯하다. 시험 말고 더 공정한 대안이 있느냐는 힐난도 있다. 불신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서 현실적인 지적이다. 그래도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대중이 분노하는 세습받은 재벌 자식, 음서를 이용하는 자들은 이 능력 검증의 거센 요구에서 별 타격을 받지 않는다. 이런 요구가 거세질수록 힘든 쪽은 비빌 언덕 없는 을들이다. 공정성이 논란이 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공정성 자체에 대한 논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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