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일제강점기 문학의 사회참여를 외치며 활동하던 카프 작가 중 김남천은 1931년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전향한다. 그가 1937년 발표한 작품 <처를 때리고>는 전향 이후의 자기고백적 소설로 평가받는데,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남수는 한때 사회주의 운동의 거두였지만 전향을 한 인물이다. 먹고살 길이 막막하자 생계유지를 명분으로 변호사 친구에게 빌붙어 무위도식하며 생활한다. 그러다 출판사업을 한답시고 어린 후배 창훈을 끌어들인다. 후배 창훈은 속물적이고 여성을 ‘후리는’ 매력이 있는, 속된 말로 ‘나쁜 남자’다. 사건은 남수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창훈과 저녁을 먹고 산책한 사실을 속인 게 들통이 나면서 시작한다. 남수는 처에게 폭언을 퍼붓고 이윽고 처를 때린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수의 모습은 비루하고 비참하다. 사회주의 활동의 동지이자 애인이자 처였던 아내의 독백은 혁명이라는 이상을 품었던 한 인간의 전향 이후를 아프게 폭로한다.

“야 사회주의자 참 훌륭허구나. 질투심. 시기심. 파벌 심리. 허영심. 굴욕. 허세. 비겁. 인치키(속임수). 브로커. 네 몸을 흐르는 혈관 속에 민중을 위하는 피가 한 방울이래도 남아서 흘러 있다면 내 목을 바치리라.”

물론 남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폭력의 힘으로 내면의 항복을 요구하는 전향제도를 빼놓고서 남수의 찌질함을 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지난 23일 보안관찰법으로 기소된 강용주의 네번째 재판이 열렸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23살에 고문 조작으로 ‘간첩’이 되어 무려 14년간 전향을 거부하며 감옥에서 지냈다. 전향제도가 국제사회로부터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오랜 비판 끝에 준법서약서로 바뀌었으나 이 또한 거부했다. 그러자 보안관찰법이 그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었다. 보안관찰법은 국가보안법, 내란음모, 반란예비죄 등의 혐의로 3년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을 감시·통제하는 법이다. 주거 이전 등 관할 경찰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모든 내용을 3개월 단위로 시시콜콜 신고해야 한다.

보안관찰법은 일제가 1936년 만들어낸 보호관찰령의 후신이다. 그때처럼 지금도 그 핵심에는 전향 문제가 있다. 준법서약서 쓰기를 거부한 자에 대해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감시, 보고하게 만드는 것이 이 법이다. 그까짓 보고가 대수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안관찰법에서 요구하는 3개월 단위의 ‘보고’는 핑계일 뿐 이것을 고리로 내면의 자기결정권을 파괴하고, 결국 체제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개조시키려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다. 소설의 주인공 남수처럼 전향은 결국 한 인간의 내면을 파괴하는 제도이며, 그 끝은 비루하고 찌질한 인간으로의 전락이다.

고맙게도 강용주는 남수처럼 비루해지지도 않았고, 복종하지도 않았다. 어느 글에서 그는 자신을 ‘광산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광부들은 갱에 들어가기 전 카나리아를 먼저 안으로 날려 보내, 카나리아 소리로 갱의 안전 여부를 확인했다. 광산의 카나리아처럼 강용주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공기 같은 존재의 고마움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시민혁명을 통해 쟁취해낸 권리이자 근대국가 체제의 토대가 된 기본권이다.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복지권, 심지어 동물권까지 논의되는 시대다.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대표 악법인 보안관찰법과 전향제도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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