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한겨레 프리즘] 진보정치의 열린 틈새

admin 2015. 07. 20
조회수 3177

한귀영 사회조사센터장.JPG

2004년 총선에서 신생 민주노동당은 정당득표율 13.1%를 얻어 단번에 10석을 획득했다. 선거 직후 시골 폐교를 약간 손본 남원연수원에서 국회의원과 평당원이 어울려 밤새 토론하고 의원도 자기 식기는 손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기성 정치의 문법을 깨는 신선한 모습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한때 당 지지도가 20%를 넘었다. 당시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과 정책진용은 정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 보수언론마저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민노당 정책실에는 폐쇄적이지 않고 ‘진보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독종들이 많았다. 이들이 만든 정책이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복지 확대를 위한 조세개혁,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같은 것들이었다. 대형마트 규제는 8년 뒤에 빛을 봤고, 조세개혁과 복지는 지금 정치권의 가장 큰 쟁점이다.”

이 모든 것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덕에 가능했다. 동시에 이 제도의 결함도 적나라했다. 진보정당은 당세에 비해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기대를 모은 의원들을 여럿 배출했다. 비례대표 1회 원칙에 따라 지역구로 출마한 의원들은 명성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거대 기성정당의 조직과 물량전 앞에서 진보정당의 힘은 가냘팠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8할이 선거제도 개혁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제도 탓에 진보정당은 만년 미니정당이었다.

그 시절 이후 십여년 만에 선거제도 개혁의 기회가 열렸다. 내년 총선 전까지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조정해야 한다는 작년 10월 헌법재판소 결정이 발단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정치학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의견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적정한 의원 정수를 ‘최소 330명’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전체의 70.2%였고, 현재의 국회의원 정원을 유지할 경우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77.5%에 이르렀다. 또 하나 주목할 의견도 있었다. 지구당을 부활하고 정당 설립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정당에 대해 누구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해왔던 이들의 의견이기에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이들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이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는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높은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정의당 신규 당원이 약 400명에 이른다. 정치의 힘, 가능성을 복구했다는 데서 이번 선거의 의미를 찾고 싶다.

그 가운데 조성주라는 정치 신인이 있다. 그는 당대표 출마의 변에서 2세대 진보정치는 노동운동 밖의 노동자들, 광장 밖의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정치는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고 위로여야 한다”며 “어떻게 정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말로 낙선인사를 마무리했다. 어느 쪽이든 울림이 깊었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시민의 기본 덕목처럼 여기는 세상에, 정치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열망을 신선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모처럼 진보 정치에 가능성의 틈새가 열렸다. 이 틈새가 의미있는 현실로 확장되려면 선거제도 개혁이 필수다. 이상적인 원론들은 일단 제쳐두자면 비례대표 의원 수 확대가 핵심이다. 여야 거대정당은 기득권 유지에 집중할 것이고, 일부 언론은 언제나처럼 개혁을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이 상수들을 변수로 만들어온 것은 결국 대중의 관심과 지지였다. 진보 정치가 그 일을 해내야 한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등록 :2015-07-19 18:46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0851.html
첨부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위대한 왜곡’?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 번역에 관하여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12일(현지시각) 교내 알렉산더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수상소감을 밝히며 양손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프린스턴/AP 연합뉴스 ▶편집자 주: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

  • admin
  • 2015.10.20
  • 조회수 4308

[한겨레 프리즘] 청년담론이 감추는 것들

2002년 이후 한국 정치의 지배적인 프레임은 세대갈등론이었다. 더 많은 불안과 위기에 놓인 젊은 세대가 결집해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야권이 선거 때마다 동원해왔던 전략이다.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세대갈등론은 ‘청년착...

  • admin
  • 2015.10.19
  • 조회수 3387

[유레카] 엇갈린 불평등 담론?

경제학자들에게 불평등 문제는 늘 거북한 주제이다. 불평등의 절대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데다 이론적으로는 경제 규모, 즉 총생산이 증가하면 불평등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다는 생각이 주류 경제학계 안에서는 지배적이었다...

  • admin
  • 2015.10.15
  • 조회수 3205

[싱크탱크 시각] ‘청년희망펀드’, 정말 희망 주려면

지난 추석 명절 고향 가는 차 안에서 대학 졸업을 앞둔 딸과 얘기를 나눴다. 요즘 친구들이 만나면 주로 진로 문제나 이민 얘기를 많이 한단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단다. 이민 관련 정보를 나누고...

  • admin
  • 2015.10.05
  • 조회수 3334

[김공회의 경제산책] ‘진짜 저성과자’를 개혁하자!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어려서부터 하도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한 말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것이다. ‘은근과 끈기’로 온갖 외세의 공격에 맞섰고, 나라가 위태로...

  • admin
  • 2015.09.22
  • 조회수 4004

[한겨레 프리즘] 프로와 밥값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김성근 감독은 한국 사회에서 화제와 논란의 인물이다. 그의 감독 경력은 비주류로서 주류에 맞서온 도전의 여정으로 그려졌지만, 늘 따라다닌 혹사 논란은 그 도전의 정당성을 의문...

  • admin
  • 2015.09.21
  • 조회수 2991

[싱크탱크 시각] ‘노동 개혁’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노사정위원회 합의 시한이 결국 지나버렸다.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한국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한 날짜가 8월26일이다. 노사정 대표자가 몇 차례 만나...

  • admin
  • 2015.09.14
  • 조회수 3943

[싱크탱크 시각] 국회 문턱에 걸린 ‘생활임금’

이현숙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생활임금을 받으니 일할 맛도 나고, 생계 걱정도 덜 하게 됐어요.” 얼마 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성북구청 환경미화원인 박용범씨가 생활임금으로 생긴 변화에 대해 한 말이다. 20...

  • admin
  • 2015.09.07
  • 조회수 3500

[김공회의 경제산책] 영국 노동당 코빈의 상식적인 경제정책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가 흥미롭다. 지난 5월 총선에서 허망하게 패배한 뒤 불과 3개월만에 이 정도의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하다. 대통령 선거에서 지고 2년 반이 흘렀지만 여전히 패배와 불신의 늪에서...

  • admin
  • 2015.08.25
  • 조회수 4000

[유레카] 최저임금 / 김회승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경제학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셀 수 없이 많은 실증 연구가 있지만 결론은 양쪽으로 갈린다. 고전학파는 “비숙련 노동자를 내쫓게 된다”며 최저임금 제도와 인상에 부정적이다. 가격(임금)을 ...

  • admin
  • 2015.08.24
  • 조회수 3862

[싱크탱크 시각] 고용에 대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 이상호

청년실업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최근 몇몇 재벌들이 앞다퉈 대대적인 일자리 만들기를 발표하고 있다. 정부와 경제 6단체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청년 일자리 기회 20만+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정부-경제계 협력 선언’의...

  • admin
  • 2015.08.24
  • 조회수 3692

[한겨레 프리즘] 로비의 문을 닫지마라 / 한귀영

얼마 전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남자 국가대표팀이 우승을 했다. 대표선수 중 상당수가 축구팬에게도 낯선 신인들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수시로 K리그 경기를 직접 관전하고,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를 선발했다고 한다....

  • admin
  • 2015.08.24
  • 조회수 3284

[싱크탱크 시각] 우린 도대체 무얼 먹고 있는걸까

얼마 전 간장을 사러 동네슈퍼에 갔다. 식구가 적어 간장을 가끔 사다보니, 늘 처음 보는 상품들이 많다. ‘자연 그대로’ ‘무첨가’ ‘자연숙성’ 등 포장 앞면의 수식어는 엇비슷해 상품 선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 포장...

  • admin
  • 2015.08.17
  • 조회수 3407

[싱크탱크 시각] 누가 청년을 고용절벽으로 내모는가?

언제부터인가 ‘고용 절벽’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통념상 고용 절벽은 기업의 고용 여력이 떨어지면서 일자리가 급감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소 섬뜩한 이 단어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년...

  • admin
  • 2015.08.03
  • 조회수 3258

[유레카] 금과 달러

국제 금값은 서구 은행들이 결정하는 ‘런던 금 가격’이 표준이다. 1트로이온스(약 31g) 가격을 달러화로 표시해, 런던 시각 기준으로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공시한다. 1919년부터 시작된 관행이다. 지난해 일부 은행의 ...

  • admin
  • 2015.07.29
  • 조회수 4527

[김공회의 경제산책] 우리의 ‘거울’이기도 한 그리스

요즘 그리스를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곤 한다. 단순히 과거에 우리가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어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의 현재가 한국경제의 중요한 일면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는 위기에 빠졌는가? 한쪽에...

  • admin
  • 2015.07.28
  • 조회수 4442

[싱크탱크 시각] 외씨버선길의 ‘느린 경제’ 실험

2007년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걷는 길들이 유행처럼 만들어졌다.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누리집을 보면 현재 전국에 걷는 코스는 1600여개에 이른다. 5년 전에 비해 1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많은 길들이 생겨난...

  • admin
  • 2015.07.27
  • 조회수 3787

[한겨레 프리즘] 진보정치의 열린 틈새

2004년 총선에서 신생 민주노동당은 정당득표율 13.1%를 얻어 단번에 10석을 획득했다. 선거 직후 시골 폐교를 약간 손본 남원연수원에서 국회의원과 평당원이 어울려 밤새 토론하고 의원도 자기 식기는 손수 설거지를 하는 ...

  • admin
  • 2015.07.20
  • 조회수 3177

[싱크탱크 시각] 대통령이 정치를 하는 이유?

박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부원장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8일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다고 했다.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는 민주공화국...

  • admin
  • 2015.07.13
  • 조회수 3237

[유레카] 엘리엇 펀드

전세계 헤지펀드는 1만1천여개, 운용자산은 3천조원으로 추산된다. 투자금보다 많은 돈을 차입하는 게 관행이어서, 실제 굴리는 돈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헤지펀드는 말 그대로 투자 위험을 철저히 회피(hedge·헤지)하는 ‘무위...

  • admin
  • 2015.07.06
  • 조회수 3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