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0.04.05 수정: 2014.10.17


어린이날 되돌아보는 튤립 투기의 역사.jpg

  지난해 어린이날, 모처럼 가족들과 서울 근교에서 열린 한 바자회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꽃이 가득 피어 있었고, 꽃처럼 예쁜 어린아이들이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날씨도 아주 화창했지요.


 가득 핀 꽃을 들여다보다 보니, 문득 지금이 튤립 제 철이라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놀이공원마다 열리는 튤립축제도 이제 막바지이겠네요. 어린이날도 어김없이 어린이와 부모와 연인들로 가득 찼겠지요. 튤립이 절정이면, 이제 봄도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네요.


 그리고 바로 이어, 튤립에 얽힌 돈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요즘 주가나 부동산값이 들썩인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이야기입니다.


원래 튤립은 연인들의 꽃이지요. 튤립의 꽃말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관련글 링크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인들에게 튤립은 '돈'이었습니다. '사랑'이나 '열정' 따위의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었지요. 그것도 푼돈이 아니라 거액의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희망이었습니다. 지금의 주식이나 아파트와 비슷했다고나 할까요?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자라던 튤립은 16세기 터키(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투르크 말로도 신(알라)과 같은 뜻인 '라레'라고 불리던 성스러운 꽃이었다고 하지요. 유럽으로 넘어온 튤립은 다른 나라에서보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꽃은 17세기 초 네덜란드로 전해지면서 교양과 부유함을 드러내는 과시의 수단으로 자리잡았지요.  이는 당시 역사상 가장 부유한 '황금시대'로 여겨지던 네덜란드의 특수한 상황 탓이었습니다.

16세기 말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된 세력으로 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레헨트'라는 평시민 집단이 네덜란드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합니다. 귀족들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지요. 레헨트 계급의 주류는 돈이 많은 사업가들의 2~3세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해외무역이나 채권투자 등을 통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정치에 참여했지요.


처음에는 그저 '값이 좀 비싼 아름답고 귀한 꽃'이었던 튤립은, 레헨트 계급을 중심으로 '튤립갖기 열풍'이 번져가면서 예술작품으로까지 격상됐습니다. 1630년대에 이르면서는 이 열풍이 투기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고요. 부자들은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을 털어서라도 진귀한 튤립 구근 하나를 구입해 '고귀한 신분'으로 행세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벌어, 레헨트 계급처럼 사회지배층으로 올라서려는 부푼 꿈을 갖고 빚을 내서라도 비싼 튤립 구근을 사들이고 재배하기도 했지요.


전국적인 투기 열풍 속에, 급기야 튤립은 '금'이나 '은'보다 더 유용한 투자수단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지금의 증권거래소처럼 튤립 경매장이 따로 생겨 사람들이 튤립을 거래했다고 하네요. 이런 열풍 속에 어떤 사람들은 튤립 선물·옵션시장까지 열었다고 합니다. 1635년에는 튤립 구근 하나를 당시 화폐 2500길더를 주고 사들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당시 돼지 한 마리가 3길더이고 황소 한마리가 100길더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지요. 급기야 1637년에는 양파 모양의 튤립 구근 하나가 역사상 최고가인 5200길더에 팔리기까지 했는데요. 목수 1년 연봉이 250길더였다니, 튤립 구근 한개가 200년치 연봉보다 비쌌던 셈이네요.


물론 투기열풍의 끝은 참혹했습니다. '값이 너무 올랐다'는 시장의 불안이 번져가면서 1637년 2월을 꼭지로 튤립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지요. 어떤 튤립 값은 두달 만에 100분의 1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빚을 내어 튤립에 투자했던 사람들의 파산이 잇따랐고요. 네덜란드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요. 정부는 튤립 가격이 갑자기 하락할 이유가 없다는 발표를 되풀이했지만 투매현상은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뒤 증시에서 '튤립장세'라는 말은, 경제기반은 받쳐주지도 않는데 지나치게 주가가 오르는 거품 증시를 빗대어 가리키는 말로 증권전문가들에 의해 애용됩니다.


물론 뒤집어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건전한 경제기반이 받치고 있든 사람들의 허영심이 받치고 있든, 일단 인기가 오르고 수요가 많으면 가격은 오르게 마련이라는 식으로요. 시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튤립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 ‘넘버3’에서 검사 역을 맡은 최민식씨가 한 대사가 떠오르네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사람이 죄지.”  빗대면 이렇게 되나요? “튤립이 무슨 죄가 있냐? 그걸 사들이는 사람이 문제지.”


튤립 투자열풍은 이제 없지만 튤립은 여전히 남아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번 연휴 놀이공원에는 튤립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놀이공원 운영업체에게 튤립은 여전히 사랑이나 열정의 꽃이기보다는 큰 돈벌이의 수단이겠네요. 17세기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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