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4.28 수정: 2014.11.10
월스트리트 인턴 경험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체험할 수 있었고, 한국경제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 솔직한 체험기를 썼습니다.
MBA과정 재학 중의 일이다. 비즈니스스쿨에 입학하면, 처음부터 귀에 따갑게 듣기 시작하는 것이 “서머 인턴”이라는 말이다.
첫 1년을 마친 뒤 석달 남짓 주어지는 여름 방학 동안 MBA들은 기업에서 일하며 배우는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 때 어떤 회사에서 인턴 경험을 했느냐가 졸업 뒤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미국에서 취업하려는 외국 학생이나, 이전에 몸담고 있던 업종과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학생에게 여름 인턴은 학교 성적보다도 중요하다.
커리어 변경의 관문, 여름인턴
미국 직장 경험이 없이 그 나라에서 취업하려면 미국에서 인턴을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금융권 경험이 없이 투자은행에 취업하려 한다거나, 컨설팅 경험이 없이 컨설턴트가 되려 한다면 금융권이나 컨설팅회사에서의 인턴 경험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전통산업에서 일하다가 정보통신 같은 첨단산업으로 옮겨갈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 미디어 업계 출신이라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여름 인턴을 한다면, 졸업 뒤에는 전세계 정보통신업계 전체로 기회가 확대된다. 그러나 여름 인턴을 거치지 않았다면 졸업 뒤에는 거의 100% 한국 미디어 업계로 돌아가게 된다.
실제로 MBA 입학생의 대부분은 커리어 체인지를 원한다. 그래서 MBA과정 입학 초기 가장 먼저 배우기 시작하는 것 중 하나가 “여름 인턴 구하는 법”이다.
나는 MBA 1년을 마친 뒤 여름방학 석 달 동안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거시경제컨설팅 회사에서 서머인턴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그 회사는 주로 헤지펀드를 대상으로 거시경제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컨설팅 경험도, 금융 경험도, 미국 직장 경험도 없던 나로서는 사실 최고의 기회였다. 거기서 일한 귀중한 경험은 졸업 뒤 선택의 폭을 크게 넓혀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일자리를 얻는 과정은 험난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잡서치 파일을 다시 들춰봤다. 여름 인턴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냈던 곳은 무려 28군데였다. 그 중 오퍼를 준 곳은 단 두 곳. 한 곳은 앞서 이야기한 월가의 회사였고, 다른 한 곳은 한국 회사였다.
절망과 절망 끝에…
잡 서치 초기는 그야말로 절망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일하던 곳과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미국 금융사를 중심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낸 이력서가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애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편지를 작성해 이력서와 함께 보내면, “지원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일할 충분한 자격이 된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번 지원 기간에는 아주 훌륭한 후보자가 너무 많이 지원한 관계로, 죄송합니다만 다음 기회에……”라는 내용의 채용 거절 답장이 쏟아졌다.
나는 좌절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학교에서 좋은 MBA교육을 받고 있는데, 뽑아준다면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을 학교에서 잔뜩 배우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를 외면할까?
내가 지원한 기업들은 모두 나를 당장 데려다 일을 시키고 싶어한다. 그런 기업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나는 나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분석을 시작했다. 자기소개서의 화려한 수사를 모두 빼버리고 아주 건조하게 분석했다. 그랬더니 사실 채용 담당자 입장에서는 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몇 가지 밖에 없었다.
(1) 이 사람은 MIT에서 MBA과정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MIT MBA이니 뭔가 분석을 해오라고 하면 숫자를 넣어서 깔끔하고 정확하게 잘 해올 것 같다. 그리고 MIT가 받아줬다면 이전 학교나 직장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은 사람일 것이다.
(2) 이 사람은 한국 사람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북아 문화권의 사정에 대해서도 서양 사람보다는 상대적으로 잘 알 수도 있겠다.
(3) 이 사람은 전직 신문 기자다. 글은 논리적으로 잘 쓸 것이다. 한국에서 경제담당 기자생활을 했으니, 한국의 고위 관료나 기업인과 개인적 친분이 있을 수 있겠다.
(4) 이 사람은 학부 때 경제학을 전공했다. 다른 MBA학생들보다 기초는 탄탄할 것 같다.
(5) 이 사람은 미국에서 서머 인턴을 하고 싶어한다. 나중에 미국에서 일하려 하는 것 같다. 졸업 뒤에 우리 회사에 지원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미국 월스트리트의 금융사가 서머 인턴으로 채용을 결정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1)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모자랐다. (2), (3)은 나만이 갖고 있는 강점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월가 금융사가 필요한 자질이 아니다.
좋은 학교에서 MBA과정을 밟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쟁력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그런 회사에는 똑같이 톱스쿨 MBA를 다니는 수많은 학생들이 지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전직 금융인이나 컨설턴트가 수없이 많을 것이고, 대부분은 미국인일 것이다. 그들이 나보다 서머 인턴으로서의 경쟁력이 더 높은 것은 물론이다. 미국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고, 미국 기업이나 미국 경제를 분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닌가.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다
분석이 끝난 뒤 나는 방향을 틀었다. (2)와 (3)의 자질이 필요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난 곳이 바로 내가 일한 거시경제컨설팅 회사다. 그 회사에서 찾고 있는 사람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의 거시경제 분석을 도와줄 애널리스트였다. 거시경제 분석이다 보니, 금리나 환율 같은 거시경제 변수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게다가 정책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했고,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 정책 당국자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면 금상첨화였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 회사의 필요에 들어맞았다.
최종면접 때 마지막 질문은 한국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 한국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 소추를 승인할까요, 기각할까요?” 그 순간 내 눈에는 파란 신호가 보였다. 그야말로 한국 정치를 속속들이 이해하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을 바로 눈앞에 둔 어느 날, 나는 감격의 합격 편지를 받았다.
내 휴지통에 채용 거절 메일이 한 장 두 장 쌓여가는 그 험난한 과정에서도 두 가지 큰 교훈을 배웠다. 우선 일자리 찾기에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학벌이 아니라 나와 그 일자리 사이의 궁합(fit)이라는 것이다. 화려한 학벌도 나의 인생 경로를 덮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 큰 교훈은, 인생에 횡재는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는 과거의 누적이고,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다. 과거는 자산이자 부채다. 그걸 부정하려 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며, 하찮아 보이는 그 과거가 어디서 가치를 빛낼 수 있는지 고민할 때, 꿈은 이루어진다.
* 단행본 'MIT MBA 강의노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