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착한경제] 나의 월스트리트 취업기

HERI 2014. 11. 10
조회수 11633

등록: 2010.04.28 수정: 2014.11.10


월스트리트 인턴 경험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체험할 수 있었고, 한국경제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 솔직한 체험기를 썼습니다.


MBA과정 재학 중의 일이다. 비즈니스스쿨에 입학하면, 처음부터 귀에 따갑게 듣기 시작하는 것이 “서머 인턴”이라는 말이다.


첫 1년을 마친 뒤 석달 남짓 주어지는 여름 방학 동안 MBA들은 기업에서 일하며 배우는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 때 어떤 회사에서 인턴 경험을 했느냐가 졸업 뒤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미국에서 취업하려는 외국 학생이나, 이전에 몸담고 있던 업종과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학생에게 여름 인턴은 학교 성적보다도 중요하다.


커리어 변경의 관문, 여름인턴


미국 직장 경험이 없이 그 나라에서 취업하려면 미국에서 인턴을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금융권 경험이 없이 투자은행에 취업하려 한다거나, 컨설팅 경험이 없이 컨설턴트가 되려 한다면 금융권이나 컨설팅회사에서의 인턴 경험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전통산업에서 일하다가 정보통신 같은 첨단산업으로 옮겨갈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 미디어 업계 출신이라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여름 인턴을 한다면, 졸업 뒤에는 전세계 정보통신업계 전체로 기회가 확대된다. 그러나 여름 인턴을 거치지 않았다면 졸업 뒤에는 거의 100% 한국 미디어 업계로 돌아가게 된다.


실제로 MBA 입학생의 대부분은 커리어 체인지를 원한다. 그래서 MBA과정 입학 초기 가장 먼저 배우기 시작하는 것 중 하나가 “여름 인턴 구하는 법”이다.


나는 MBA 1년을 마친 뒤 여름방학 석 달 동안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거시경제컨설팅 회사에서 서머인턴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그 회사는 주로 헤지펀드를 대상으로 거시경제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컨설팅 경험도, 금융 경험도, 미국 직장 경험도 없던 나로서는 사실 최고의 기회였다. 거기서 일한 귀중한 경험은 졸업 뒤 선택의 폭을 크게 넓혀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일자리를 얻는 과정은 험난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잡서치 파일을 다시 들춰봤다. 여름 인턴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냈던 곳은 무려 28군데였다. 그 중 오퍼를 준 곳은 단 두 곳. 한 곳은 앞서 이야기한 월가의 회사였고, 다른 한 곳은 한국 회사였다.


절망과 절망 끝에…


잡 서치 초기는 그야말로 절망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일하던 곳과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미국 금융사를 중심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낸 이력서가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애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편지를 작성해 이력서와 함께 보내면, “지원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일할 충분한 자격이 된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번 지원 기간에는 아주 훌륭한 후보자가 너무 많이 지원한 관계로, 죄송합니다만 다음 기회에……”라는 내용의 채용 거절 답장이 쏟아졌다.


나는 좌절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학교에서 좋은 MBA교육을 받고 있는데, 뽑아준다면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을 학교에서 잔뜩 배우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를 외면할까?


내가 지원한 기업들은 모두 나를 당장 데려다 일을 시키고 싶어한다. 그런 기업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나는 나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분석을 시작했다. 자기소개서의 화려한 수사를 모두 빼버리고 아주 건조하게 분석했다. 그랬더니 사실 채용 담당자 입장에서는 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몇 가지 밖에 없었다.


(1) 이 사람은 MIT에서 MBA과정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MIT MBA이니 뭔가 분석을 해오라고 하면 숫자를 넣어서 깔끔하고 정확하게 잘 해올 것 같다. 그리고 MIT가 받아줬다면 이전 학교나 직장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은 사람일 것이다.

(2) 이 사람은 한국 사람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북아 문화권의 사정에 대해서도 서양 사람보다는 상대적으로 잘 알 수도 있겠다.

(3) 이 사람은 전직 신문 기자다. 글은 논리적으로 잘 쓸 것이다. 한국에서 경제담당 기자생활을 했으니, 한국의 고위 관료나 기업인과 개인적 친분이 있을 수 있겠다.

(4) 이 사람은 학부 때 경제학을 전공했다. 다른 MBA학생들보다 기초는 탄탄할 것 같다.

(5) 이 사람은 미국에서 서머 인턴을 하고 싶어한다. 나중에 미국에서 일하려 하는 것 같다. 졸업 뒤에 우리 회사에 지원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미국 월스트리트의 금융사가 서머 인턴으로 채용을 결정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1)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모자랐다. (2), (3)은 나만이 갖고 있는 강점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월가 금융사가 필요한 자질이 아니다.


좋은 학교에서 MBA과정을 밟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쟁력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그런 회사에는 똑같이 톱스쿨 MBA를 다니는 수많은 학생들이 지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전직 금융인이나 컨설턴트가 수없이 많을 것이고, 대부분은 미국인일 것이다. 그들이 나보다 서머 인턴으로서의 경쟁력이 더 높은 것은 물론이다. 미국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고, 미국 기업이나 미국 경제를 분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닌가.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다


분석이 끝난 뒤 나는 방향을 틀었다. (2)와 (3)의 자질이 필요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난 곳이 바로 내가 일한 거시경제컨설팅 회사다. 그 회사에서 찾고 있는 사람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의 거시경제 분석을 도와줄 애널리스트였다. 거시경제 분석이다 보니, 금리나 환율 같은 거시경제 변수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게다가 정책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했고,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 정책 당국자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면 금상첨화였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 회사의 필요에 들어맞았다.


최종면접 때 마지막 질문은 한국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 한국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 소추를 승인할까요, 기각할까요?” 그 순간 내 눈에는 파란 신호가 보였다. 그야말로 한국 정치를 속속들이 이해하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을 바로 눈앞에 둔 어느 날, 나는 감격의 합격 편지를 받았다.


내 휴지통에 채용 거절 메일이 한 장 두 장 쌓여가는 그 험난한 과정에서도 두 가지 큰 교훈을 배웠다. 우선 일자리 찾기에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학벌이 아니라 나와 그 일자리 사이의 궁합(fit)이라는 것이다. 화려한 학벌도 나의 인생 경로를 덮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 큰 교훈은, 인생에 횡재는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는 과거의 누적이고,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다. 과거는 자산이자 부채다. 그걸 부정하려 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며, 하찮아 보이는 그 과거가 어디서 가치를 빛낼 수 있는지 고민할 때, 꿈은 이루어진다.


* 단행본 'MIT MBA 강의노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착한경제] 대왕오징어의 여행: 오징어 젓갈의 비밀

등록: 2010.05.14 수정: 2014.11.10 맛도 없고 엄청 크기만 한 대왕 오징어. 먼 나라의 가난한 어부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잡아도 도로 놓아주어야 하는 골치덩어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았을까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

  • HERI
  • 2014.11.10
  • 조회수 8572

[착한경제] '주류경제학자'가 좌파로 불린 이유

등록: 2010.05.14 수정: 2014.11.10 “경제학 수험도서로 ‘원론은 조순, 거시는 정운찬, 미시는 이준구’가 대세였던 때가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다. 이제 ‘거시’는 ‘원론’을 따라 사실상 정치의 길로 ...

  • HERI
  • 2014.11.10
  • 조회수 5327

[착한경제-청사과 운영일기] 지치지 않아!

등록: 2010.05.14 수정: 2014.11.10 2010년 5월 8일, 청사과 3주차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보충수업 1시간, 이은애 선생님의 1시간 40분, 윤봉규 교수님의 1시간 40분을 연강으로 진행해도 지치지 않은 눈빛을 보여준 우리의 청사...

  • HERI
  • 2014.11.10
  • 조회수 4292

[착한경제] 중국 싱크탱크의 오늘과 내일을 논한다

등록: 2010.05.13 수정: 2014.11.10 이 글은 중국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南方周末) 2010년 2월 24일에 실렸던 것으로, 중국 싱크탱크의 현재 상황과 고민, 대안적 제안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글이라 여겨져 번역, 소개한다. 중국...

  • HERI
  • 2014.11.10
  • 조회수 4297

[착한경제]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적극 활용을

등록: 2010.05.13 수정: 2014.11.10 [지상컨설팅] 온라인 홍보와 마케팅을 활용하고 싶은데 지속가능경영, 사회적기업 등과 관련해 어려움을 겪고 계세요? 한겨레경제연구소가 'HERI 지상컨설팅'으로 여러분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

  • HERI
  • 2014.11.10
  • 조회수 3733

[착한경제] 착한기업이 성공하는 3가지 이유

등록: 2010.05.12 수정: 2014.11.10 '착하면 바보같다'는 게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의 통념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생존하고 성장하는 기업에게 '착하다'는 단어는 그래서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착함'이 경쟁력인 세...

  • HERI
  • 2014.11.10
  • 조회수 4781

[착한경제] 지속가능한 경쟁우위, 결국 소비자의 손에 달렸다

등록: 2010.05.12 수정: 2014.11.10 전략 경영의 대가, 제이 바니 교수가 지속가능한 경쟁우위를 창출할 수 있는 4가지 조건을 말한지 20년이 흘렀다. 과연 그 이야기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진리일까? 기업을 이끌고 있는 모든...

  • HERI
  • 2014.11.10
  • 조회수 14980

[착한경제] 세상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

등록: 2010.05.11 수정: 2014.11.10 만약 지난 2007년 12월 태안군 기름 유출 사건의 당사자 삼성중공업이 태안이 아닌 미국의 멕시코 만에서 유사한 사건에 연루됐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미국 현지 시간으로 지난 4월 30일...

  • HERI
  • 2014.11.10
  • 조회수 4517

[착한경제] 노무현 시절, 월가에서 본 한국경제 희망

등록: 2010.05.10 수정: 2014.11.10 노무현 대통령 시절, '좌파 대통령 때문에 외국인투자자가 빠져나가고, 경제위기가 임박했다'는 투의 글이 국내 주요신문 헤드라인을 버젓이 장식했다. 그 때 나는 월스트리트에서 인턴 애널리스...

  • HERI
  • 2014.11.10
  • 조회수 5087

[착한경제] 베이징 모터쇼의 쓸쓸한 자동차들

등록: 2010.05.10 수정: 2014.11.10 한중일기업의 CSR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던 중 '오토 차이나 2010' (11회 베이징 모터쇼)를 관람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환경문제가 현안이 되면서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친환경...

  • HERI
  • 2014.11.10
  • 조회수 3969

[착한경제-청사과 운영일기] 변화는 시작되었다

등록: 2010.05.07 수정: 2014.11.10 청년사회혁신가 과정(이하 청사과)가 5월 1일, 이원재 소장의 강의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하필 노동자의 날 일해야 하는 것은 속상했지만, 그것보다는 저(?)를 기다리는 28명의 예비 ...

  • HERI
  • 2014.11.10
  • 조회수 3751

[착한경제] 어닝 서프라이즈의 불편한 진실

등록: 2010.05.07 수정: 2014.11.10 주식시장에는 어닝 서프라이즈(Earning Surprise)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실적이 크게 개선된 기업들의 주가가 상승하는 현상이죠. 최근 우리 대표기업들의 1분기 실적이 속...

  • HERI
  • 2014.11.10
  • 조회수 4306

[착한경제] 미국 지역언론, 신문 지고 싱크탱크 뜬다

등록: 2010.05.06 수정: 2014.11.10 미국 보수의 '싱크탱크 저널리즘'이 문제가 되고 있다. 보수 싱크탱크들이 자금을 지원하여 만든 인터넷 언론의 위험성에 관한 논란이다. 이 문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 '풀뿌리...

  • HERI
  • 2014.11.10
  • 조회수 4895

[착한경제] 삼성, 지속가능한 초우량기업이 되려면

등록: 2010.05.06 수정: 2014.11.10 1980년대 세계적 초우량기업 46개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업은 고작 여섯 개 뿐이다. 잘 나가는 기업 만들기보다, 지속가능한 기업 만들기가 더 어렵다. 도요타도 다임러크라이슬러도, 삼...

  • HERI
  • 2014.11.10
  • 조회수 4301

[착한경제]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의 경영전략

등록: 2010.05.04 수정: 2014.11.10 파리 디즈니랜드 전경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어린이에게는 '놀이공원'이 아닐까? 아니나다를까, '디즈니'라는 기업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손 들고 나선다. 그런데 디즈니의 놀이공원은 ...

  • HERI
  • 2014.11.10
  • 조회수 12039

[착한경제-유럽의 사회적기업 4회] 유럽 사회적경제 이끄는 협동조합의 힘

등록: 2010.05.04 수정: 2014.11.10 한국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은 무엇일까? 농업협동조합(농협)라는데 이견이 없을 듯 싶다. 2009년말 현재, 농협의 자산규모는 271조, 영업수익은 45조, 영업이익은 7394억에 이른다. 이 정도면 세...

  • HERI
  • 2014.11.10
  • 조회수 5417

[착한경제] 베이징, 만리장성 안의 인터넷 비즈니스

등록: 2010.05.03 수정: 2014.11.10 일주일 동안 중국 베이징에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중국에 간 것은 중국 기업이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중국 칭화...

  • HERI
  • 2014.11.10
  • 조회수 4171

[착한경제]'착한 소비자'가 추천하는 어린이날 선물

등록: 2010.05.03 수정: 2014.11.10 매년 하지만 올해도 해야 하는 고민이 바로 어린이날 선물. 갖고 싶은 걸 사주자니 뭔가 미심쩍고, 그렇다고 직접 고르자니 아이디어는 없고. 올해만큼은 배우자에게 미루지 말고 직접 골라보...

  • HERI
  • 2014.11.10
  • 조회수 5195

[착한경제] 지역경제 살릴 10만 사회적기업가 양병론

등록: 2010.04.30 수정: 2014.11.10 기업의 방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묘안, 사회적기업이 유행이다. 그런데 사회적기업이 더욱 빛을 발하려면, 수도권 중심에서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역으로 하방할, 10만 사회적기업...

  • HERI
  • 2014.11.10
  • 조회수 3777

[착한경제] 진보가 밥 먹여 준다?

등록: 2010.04.30 수정: 2014.11.10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자식들이 기회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면, 진보주의자들에게는 그 세상이 정의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어린이 노동이 횡행한다면, 그것은 불의다. 열심히 일하고, 제몫을...

  • HERI
  • 2014.11.10
  • 조회수 3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