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0.08.24 수정: 2014.11.11


세계의 유기농을 선도하는 캐나다 밴쿠버 주변을 이달 중순에 다녀왔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한국을 대표하는 유기농업인 13명과 함께, 더없이 알찬 경험을 했다. 대규모 과수농장, 병충해 방지시설, 유통 매장, 도시농업 현장을 둘러보고, 가장 원칙적인 유기농을 실천한다는 역동 바이오(Bio Dynamics) 농장 한 곳을 방문했다. 주 정부와 농업연구소에서는 유기농 정책을 소개받고 함께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농민들은 종자부터 퇴비에 이르기까지 유기농의 철학을 철두철미 실천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많이 얻은 듯했다. 유기농가의 능력과 부지런함으로는, 우리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뿌듯해했다. 건강한 환경과 안전한 먹거리를 생각하는 유기농이 미래 농업의 대세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대형 유기농 전문매장인 홀푸즈 마켓(Whole Foods Market)에서는 유기농이 식품산업의 큰 줄기로 자리잡은 현장을 직접 보았다. 식육 매장에서는 온전히 풀만 먹인 쇠고기(Grass-fed Beef)가 비싼 값에 팔렸고, 바로 곁의 판매대에는 방사한 닭의 달걀(Cage free Eggs)이 널찍한 칸을 모두 채웠다. 항생제와 공장식 사료 투입 없이 자연 그대로 길러냈다는 유기농의 가치 자체에 대해, 소비자들은 기꺼이 더 많은 지불로 신뢰를 표시했다.


실제로, 캐나다의 유기농 산업은 두자릿수 성장을 거듭해, 올해에는 식품산업 총매출의 10%에 이르리라 전망된다. 밴쿠버가 속한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유기농 산업 비중은 훨씬 더 커, 캐나다 평균의 두 배인 20%대에 육박할 정도다.


우리의 유기농 시장은 아직까지 전체 식품매출의 1% 아래다. 고온다습한 여름 기후 같은 기본적인 여건이 불리하기도 하지만, 소비자의 신뢰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거기에는 잘못된 정부 정책의 책임이 적지 않다.


‘친환경 농산물’ 인증정책이 대표적이다. 친환경 농산물에는 유기농뿐만 아니라, 무농약과 저농약 농산물까지 포함되어 있다. 무농약 농산물은 농약만 쓰지 않을 뿐이지, 석유로 만들어지는 화학비료는 무제한 투입된다. 농약을 덜 투입한다는 저농약 농산물은 냉정하게는 ‘반환경’ 농산물이다. 실제로 캐나다의 통상적인 농사로 지어진 농산물보다 농약 투입이 심하게는 10배가량 더 많다고 한다.


농림수산식품부에서는 친환경제도 도입 10년이 지난 올해부터 저농약 농산물의 신규 인증을 중단했지만, 무농약에 대해서는 여전히 친환경 인증을 부여한다. 정책 도입 초기에는 농민들이 조금이라도 농약을 덜 쓰도록 유도하자는 약간의 명분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소비자를 기만할 수는 없다. 세계 기준에 맞게 유기농 육성으로 정책을 단일화해야 한다.


항생제가 투입된 축산 분뇨를 유기농 퇴비로 인정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축산 배설물 처리가 어려워지자, 유기농을 희생물로 삼은  것이다. 이런 비상식은 세계 시장에서 우리 유기농산물의 신뢰를 멍들게 한다.


팔당 유기농 단지가 수질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정부가 앞장서서 선전한 것은 두고두고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남을 것 같다. 캐나다의 유기농 전문가를 두루 만나면서도, ‘팔당 유기농’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신뢰와 가치를 생명으로 삼는 유기농 신봉자들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홍일표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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