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8.16 수정: 2014.11.11
올 여름휴가 회심의 피서지는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이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얼음이 가득한 곳에서, 일에 찌든 몸을 스케이트에 실어 단련시킬 수 있는 곳. 게다가 내 휴가의 최대 고객인 아이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는 곳.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피서지였다.
그런데 얼음 위에 스케이트를 대는 순간부터, 시원함은 가시고 등줄기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온 몸은 굳어 가눌 수 없었다. 스케이트를 마지막으로 신었던 10여년 전의 기억은 아득하기만 했다.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몇 바퀴를 휘청거리며 돌았다. 상황은 나아졌다. 이제 벽을 잡지 않고도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청바지를 입은 채 유유히 빙상장을 미끄러지던 한 할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은. 벽 근처에서 움직이던 나를 뒤로 돌아 마주보고 선 그 할아버지는 딱 한마디의 충고를 던진다.
"천천히, 오른쪽-왼쪽으로 중심만 차례로 옮겨 보세요. 앞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중심을 가운데에 유지하려 하지 말고, 발을 빨리 바꾸려 하지 말고. 그것만 해 보세요. 잘 될 겁니다."
그리고는 유유히 떠나버린다.
그런데 그 한마디로, 초등학생 시절 이래 30년 스케이트 인생의 한이 풀렸다. 나는 앞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몇 바퀴를 서지 않고 계속 돌았다. 스케이트 신고 걷고 움직이기에 막 성공하던 그 시점, 내게 꼭 맞는 조언이었다. 그 날 나는, 생애 가장 스케이트를 잘 탄 하루를 보냈다.
그 한마디의 충고는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짧지만 강력했고, 내 상황에 꼭 맞았고, 결과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게 했던, 그런 충고였다.
우리 시대는 지금, 길고 지루하고 성과를 내지도 못하는, 무의미한 충고로 넘쳐난다. 충고의 주체는 국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다. 충고의 대상은 주로 20대, 30대 청년층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는 청년들에게,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충고를 던진다. 대표적인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내가 예전에 이렇게 타 봐서 아는데'라는 식의 복고형 충고다. 경험이 많은 리더는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유혹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되풀이하면 모두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의 경우 '흘러간 옛 노래'로만 받아들여진다.
'나는 스케이트 살 돈도 없었는데 지금은 잘 탄다'는 식의 입지전형 충고도 있다. 고위공직자나 대기업 경영자가 '나는 농민의 아들,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다. '나는 같거나 더 나은 집 아들이고 딸인데, 거기까지 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니 내가 못난 모양'이라는 절망만 불러온다.
'이 시기 한국에서 스케이트는 이렇게 타야만 옳다'는 식의 역사적 당위형 충고도 있다. 말은 옳지만 그저 무겁고 부담되어서 외면하게 되는 조언이다.
모두 충고보다는 훈계에 가까운 말들이다.
충고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충고의 내용도 잘 알아야 하지만, 충고의 대상도 정말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년에게 충고하려면, 청년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청년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전쟁과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거쳤다. 모두 극복했고 이루었고 얻어냈다. 주먹 쥐고 지켜야 할 나라도 새벽종소리 들으며 일으켜야 할 경제도 목숨 걸고 이뤄야 할 이념도 없어 보이는 게 지금의 한국사회다. 적어도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에게는 그렇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속해 있는 기업에서 자신이 이룰 사명과 비전이 명확하지 않을 때 청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중심을 천천히 옮겨 보라'는 빙상장의 충고처럼,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충고는 어떤 것일까?
쉬운 일은 아니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그거 해 봤는데',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면서 두뇌부터 심장까지 간섭하고 지시하려는 사람은, 이제 국가도 기업도 제대로 경영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부하 직원에게도, 미래가 불안한 청년에게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마디의 진정어린 충고를 해줄 수 있는, 그런 리더를 만나고 싶다.
* 이 글은 <한겨레> 칼럼 '세상읽기'에 게재됐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