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8.02 수정: 2014.11.11
범죄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중대한 범죄란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의 일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로 채워져 있으니까. 나와 내 주변 사람들도 그다지 특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환상은 범죄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야 깨진다. 사실 대부분 범죄는 아주 평범한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른다. 범죄자는 대개 순간적인 판단 잘못으로 일상을 일탈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해서, 그 잘못을 덮느라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곤 한다.
경영자가 범죄자가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윤리적 행동과 비윤리적 행동 사이에는 겨우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종이를 타넘는 순간,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잘 나가는 금융인에서, 희대의 사기범으로, 그리고 이제는 윤리경영 교육자로 변신한 패트릭 쿠스의 강연은 바로 그 점을 생생하게 전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가장 비윤리적인 행동
“감옥에 갔더니 MIT 출신들이 꽤 많더군요.” 특강을 위해 MIT의 강의실에 들어선 전직 증권인 패트릭 쿠스가 입을 열자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다음 질문에 분위기는 바로 진지해졌다. “왜 우리 시대에는 가장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 특히 금융인과 경영인들이 계속해서 비윤리적 범죄를 저지를까요?”
그의 답은 간단했다. 성공과 윤리범죄 사이를 잇는 다리는, 보통 사람들도 쉽사리 지나칠 만한 아주 사소해 보이는 비도덕적 결정들로 이뤄져 있었다. 윤리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누구도, 언제라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놀랍게도 미국인의 15분의 1이 평생 한번은 감옥에 갑니다. 더 놀라운 건 그 중 4분의 3은 죄값을 치르고 사회로 돌아와서는 그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감옥에서 만난 친구들을 보니, 심지어 마약밀매상도 되돌아가 그 일을 계속하더군요.”
그러나 쿠스는 돌아가지 않았다.
가난한 시골 출신 고학생에서 월 스트리트의 증권 브로커로, 백만장자로, 금융 범죄자로의 변신, 그리고 해외 도피와 감옥생활, 그 모든 변화를 겪고 나서야 그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운명을 바꾼 전화 두 통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미국 중부의 아이오와 주, 인구 2400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리조나 주립 대학에 입학한 그는 눈이 휘둥그래진다. 학생만 4만3천명인 캠퍼스가 너무나 커보였던 것이다. 동아리에서 부잣집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 동안은 신나게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는 점점 낯설어졌다. 그는 가난했고, 친구들은 모두 부유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주경야독하는 그와 부모님 돈으로 학교를 다니며 유유자적하는 친구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학교를 떠나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 시기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월 스트리트로 떠난 그는 증권사에 취직한다. 그리고 6년 동안 악착같이 일하며 유능한 증권맨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을 다시 한 번 바꿀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오클라호마 주 정부 재무 담당자로 채용된 친한 친구가 건 전화였다. 금융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데도 재무 담당자가 된 그 친구는, 오클라호마로 와서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바로 달려갔다.
그는 친구에게 오클라호마 주 재정을 외부 금융사에 아웃소싱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고 계획을 짜 줬다. 그리고는 스스로 회사를 하나 차려 공개입찰에 참여한다. 친구가 미리 귀띔해 준 숫자를 적어 넣은 그는 엄청난 액수의 주 정부 재산 관리 대행자로 나선다. 주 정부의 재산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자율이 매우 낮은 국채에 투자돼 있거나, 심지어 이자가 거의 없는 은행예금계좌에 들어 있었다. 주식 채권 등 대부분 금융상품을 꿰고 있는 그의 손에 돈이 들어오자 수익률이 올라간 건 당연했다.
주 정부의 친구는 다시 한번 호의를 베풀었다. 관행보다 몇 배나 많은 액수의 수수료를 쿠스에게 지급한 것이다. 수익률도 좋으니 명분도 있었다. 쿠스도 호의를 베풀었다. 그 수수료 가운데 일부를 친구에게 되돌려줬다. 물론 개인적으로 말이다.
“딱 4년만 하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또 한번 운명을 바꾸는 전화를 받았죠. 이번엔 기자였어요. 텔레비전 시사고발프로그램 ‘60분’이었죠. 노 코멘트를 한 뒤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죠.” 그 뒤 3년 동안 쿠스와 그 가족들은 중미의 코스타리카에서 도망자 생활을 한다.
쿠스는 1997년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수하고, 2001년까지 감옥 생활을 한다. 그리고 법원이 내린 208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윤리 관련 강연은 그의 직업이 됐다.
‘자격 의식’이 스스로를 망친다
“왜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비윤리적 행동을 하고 인생을 망치는지 이제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놀랍게도 성공에 이르는 과정과 윤리 스캔들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흡사하다.
그 과정은 보통 ‘자격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정도는 누려도 된다”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비윤리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가장 큰 무기다. 주경야독으로 대학 공부를 하던 그가 월 스트리트에서 계속 되뇌였던 말이기도 하다. 그는 부잣집 친구들과는 달리 돈이 많이 필요하니까, 공부하는 데도 더 힘이 들었으니까, 조금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약간 원칙을 훼손하는 건 나쁘지 않다는 정당화를 계속 했다.
예를 들면 금융 컨설턴트 시절, 고객에게 투자를 권하면서 그 위험이나 실패 가능성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쿠스 역시 “고객이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자격 의식이 거짓말을 낳은 것이다.
떼거리 의식도 정당화의 큰 무기였다. 과속운전 단속에 걸린 운전자가 항상 ‘내 앞 차는 나보다 더 빨리 갔다’고 항변하듯이, 남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냥 따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당시 월스트리트의 동료들은 누구도 고객에게 투자 위험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또 ‘초낙관주의’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지금 내가 추진하고 있는 일은 결국 다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조금만 지나치면 ‘나중에 일이 다 잘 되고 나면 지금 겪는 과정은 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결과 중심적 사고는 비윤리적 행위의 적극적 동기가 된다. 오클라호마 주 정부의 친구가 호의를 베풀 때 쿠스가 가졌던 ‘결과적으로 주 정부도 돈을 벌고 나도 돈을 버는 일 아닌가’하는 류의 생각이다. 낙관주의는 자격 의식과 만나 특유의 ‘거만함’을 낳기도 한다.
정당화와 낙관주의라는 두 가지 특성은 횟수가 거듭되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삶에 체화된다. 이런 태도가 체화된 사람에게 기회가 오면 바로 비윤리적 행위가 나온다.
어쩌면 자수성가해 성공한 사람들의 전형적 특성과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자신감을 유지하고, 결과 중심으로 사고하고, 어려움에 처해도 낙관을 잃지 않으며,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
어찌 보면 윤리에 대한 경보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사람에게 성공과 범죄는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다. 회계부정으로 회사를 파산 상태로 몰아넣은 엔론 CEO 켄 레이도, 주식 내부자 거래 혐의 유죄 판결을 받은 마사 스튜어트도 스캔들이 터지기 전까지는 얼마나 성공한 사람이었는가?
더 두려운 것은, 비윤리적 결정이 나중에 법정에 섰을 때는 대단히 극적인 사건으로 포장되지만, 실제 결정이 내려질 때는 너무나 사소한 일상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감옥에서 만난 많은 똑똑한 범죄자들은 다들 범죄자의 길로 향하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도 그 당시에는 그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엔론 회장 켄 레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은 기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마사 스튜어트의 스캔들은 휴가 중에 주식 브로커와의 나눈 대수롭지 않은 전화상 대화 몇 마디로 시작됐다.
쿠스도 공감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과정도 결과도 자연스럽다. 친구가 조금 도와줘서 정부가 돈을 벌고 내가 돈을 벌었는데, 친구에게 사례를 조금 한들 어떻겠는가?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를 칭찬했고, 다들 자신 덕에 행복했다.
잘 모르겠다면 어머니에게 여쭈라
단 한 번, 분명한 경보음이 울린 일이 있었다. 금융전문가들은 다들 칭찬하는 일을, 금융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두 여성이 가로막았다고 한다. 한 명은 아내였고, 또 한 명은 아이오와 시골 노인인 어머니였다.
오클라호마 주에서 엄청난 수수료를 받아 하루 40만 달러(4억원)가 부부 공동 계좌로 입금된 날, 쿠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내에게 자료를 잔뜩 들고 달려가서는 자상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줬다. 그런데 아내는 한 마디를 던졌다. “불법인 것 같은데.”
걱정을 전해 들은 어머니에게도 달려가 사업설명서를 보여주며 이야기했는데, 어머니도 말했다. “불법인 것 같구나.” 금융전문가도 정치인들도 모두 칭찬해 마지 않던 그의 설명을 일자무식인 두 여자가 불법이라고 몰아붙이다니,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진실이었다.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가끔 고향의 어머니께 하고 있는 일을 설명 드리고 충고를 듣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경보음이 울릴 때는 절대로 무시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한 순간의 사소한 결정입니다. 똑똑한 당신이 오늘 내린 사소한 결정 하나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희대의 금융 스캔들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 졸저 ‘MIT MBA 강의노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