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6.14 수정: 2014.11.10

“아웃소싱이 미국 경제를 망친다고요? 그건 엄청난 과장입니다. 경기가 좋아지고 일자리가 좀 늘어나면 바로 사라져 버릴 이슈지요. 하지만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커져가고 있는 불평등입니다.”
특강을 위해 MIT슬론 강의실을 찾아온 로버트 라이시는 작았다. 연단에 선 그의 키는 그를 에워싸고 귀를 기울이는 MBA학생들의 3분의 2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대했다. 그의 지식은 보수와 진보, 역사와 경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강의실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클린턴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그 내각의 노동부 장관, 이렇게 가장 미국적인 ‘주류’의 장소를 거쳤다. <국가의 일>, <부유한 노예>, <미래를 위한 약속>, <슈퍼자본주의> 같은 명저를 남기면서 신경제의 주창자로 불리웠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대안’의 목소리를 힘있게 전했다.
대답 대신 질문을 바꿔라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일자리 창출”은 언제나 아주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이슈다.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얼마나 만들어 주고 지켜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부시의 경제자문역인 맨큐 교수가 해외 아웃소싱 옹호발언을 한 뒤 민주당 쪽에서는 국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들에게 상대적으로 세제혜택을 더 주는 법안을 들고 나왔다. 반대로 부시의 경제 브레인들은 여전히 해외 아웃소싱 자체는 기업의 효율성을 높여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옹호론을 펼친다.
MIT슬론을 찾아온 로버트 라이시는 그 대답들에 다시 응답하는 대신, 질문을 바꿨다. 이제 질문은 노동자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가 아니다. 노동자를 새로운 경제와 성장의 지지자로 만들 것인지, 반대자로 만들 것인지다.
“경제 환경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해외 아웃소싱은 당연히 늘어날 것입니다. 요즘 걱정처럼 마케팅, 재무, 연구개발 등 고부가가치 직업들도 해외로 많이 나갈 겁니다. 대신 다른 종류의 지식 집약적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리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신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들어 질 겁니다. 이런 흐름이 미국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정해진 건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라이시 교수는 오프쇼어링이 미국 노동자들을 죽인다는 생각에 대해 반대한다. 해외 아웃소싱이 오히려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늘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부시 정부를 비롯해 대부분 경제학자들과 의견이 비슷하다.
대신 가정이 있다. 미국 교육 시스템이 이런 고부가가치 직업에 맞는 인력을 끊임없이 배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해외 아웃소싱은 재앙이다.
기실 해외 아웃소싱은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문제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시장은 점점 더 유연해지고 있다. 호황 중에도 기업들은 거리낌없이 인력 감축을 단행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이제 일시적인 이상 현상이 아니다.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을 측정한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경제성장률을 계속 웃돈다. 경제도 성장하지만 기술혁신으로 필요한 노동력은 더 빠르게 줄어들어서, 성장이 더 이상 일자리 창출의 동력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모든 변화가 경제에는 좋지만, 일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는 나쁜 영향을 끼칠 것처럼 보인다.
교육과 사회보장 문제만 해결하면…
하지만 라이시는 여전히 낙관적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지금이야말로 미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국면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두 가지 문제만 해결해주면 노동자들이 변화의 피해자가 아니라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는 교육의 문제다. 이제 학교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경제환경에 적응하는 데 판에 박힌 기능적 지식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 이보다는 문제를 정의하고, 풀고, 혁신하는 능력을 갖춰야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지식 자체보다는 생각하는 방법, 처음 부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날 일자리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다.
물론 미국 교육은 이런 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시는 좀 더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지금 공립학교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새겨넣어 주는 공장형 교육기관입니다. 상위 15%의 부유층이 가는 사립학교들은 아이들이 스트레스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압력솥형 교육기관이지요. 어찌 보면 그들 부모가 사는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교육이죠. 이래가지고는 미래형 노동자들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더 개방적인 교육 시스템으로의 혁신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는 사회보장의 문제다. 지금까지 미국 사회보장제도는 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퇴직금과 의료보험은 모두 기업에서 책임지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를 잃으면 생존권 자체를 박탈당하게 되고, 사람들은 일자리에 목을 매게 됐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환경에서 노동시장 유연성은 막을 수 없는 대세다. 그러다 보니 경제 환경의 변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당연한 한 가지 흐름일 뿐인 해외 아웃소싱에 대해 반대론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해프닝이 생긴다.
이 대목에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레스터 서로우 교수의 손이 올라갔다. “해외 아웃소싱이 효율성을 높여 전체 파이를 키운다는 얘기는 맞습니다. 하지만 기업만 그 과실을 향유할 뿐, 노동자는 역시 패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라이시는 바로 받아쳤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회보장 문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회복지와 일자리 사이의 ‘디커플링’이 일어나야 노동자들이 좀 더 자유로워집니다. 기업이 퇴직금으로 직원의 복지를 책임지는 시스템에서는 문제가 커질 겁니다. 복지가 직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사람들이 창의적이 됩니다. 그래야 더 유연하고 급변하는 환경에 걸맞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됩니다. 국가의 책임 아래 이뤄지는 사회복지의 확대나 공교육 강화 같은 게 분배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라고 손가락질만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유연성을 견딜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줘야 한다는 것이다. 초점을 일자리가 아니라 소득에 맞춰야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도 요즘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임금’을 강화해야 노동시장 유연화나 노동의 고부가가치화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를 갖추지 않는다면, 미국은 노동자들을 미국의 반대자로 만들게 될 것이다. 변화와 혁신에 성공하려면 변화의주인공들에게 적응력을 키워줘야 한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장관 자리를 사양하다
문제는 불평등이다. 하지만 불평등의 원인과 해결책을 어디서 찾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원인을 일자리에서 찾다 맞추다 보니 해외 아웃소싱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미국의 부유한 노동자들이 제 3세계 가난한 노동자들과 싸우는 모양새가 돼 버렸다. 인도와 중국 노동자들을 탓하던 손가락은 언제 미국 내 흑인과 여성 노동자를 탓하는 손가락으로 바뀔지 모른다. 일자리에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부추길수록 불평등은 커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점점 힘들어진다.
지금이 바로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노동자들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줘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새로운 경제환경 변화에 강력한 반대자가 될 테고, 미국의 진보,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게 라이시의 생각이었다.
라이시가 노동부 장관일 때, 기업들에게 4주 동안의 유급휴가를 강제하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제안을 한 일이 있다. “모든 사람이 비웃었죠. 글로벌 경쟁력이다 효율성이다 온갖 미사여구들이 저를 공격하는 데 동원되더군요.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해 보세요. 생산성과 경제성장률을 조금 희생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질, 좀 더 평등한 소득 분배를 이뤄낼 수 있다면 이건 선택할 만한 옵션 아닙니까?” 1996년 클린턴 1기 내각 노동부 장관 임기를 마치고, 그는 2기 내각 입각 제안을 거부하고 갑자기 물러났다. 이유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힘주어 얘기하는 ‘삶의 질’과 ‘자유로운 노동’ 같은 단어들이 더욱 진지하게 들리도록 만드는 개인사의 일부다.
* 졸저 'MIT MBA 강의노트'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 의 일환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