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10.14 수정: 2014.11.11
현 정부 들어 국책연구소의 독립성 훼손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정점에는 한국노동연구원의 파행이 있을 것이다. 노동연구원장의 '반노동자적' 발언과 행동들이 계속되었고, 연구원 노조와의 갈등은 '직장폐쇄'로까지 이어졌다. "노조를 다 때려잡아야 한다", "억울하면 정권 잡아라",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개헌을 통해 헌법에서 노동3권'을 빼야한다"는 등의 충격적 발언을 계속하던 박기성 원장이 작년 연말 물러난 이후, 노동연구원장은 아직까지 공석이다. 올해 들어 노동부 프로젝트가 완전히 중단되어 8월 이후 연구소 운영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라고 한다. 정부가 사실상 "연구원 해체"를 목표로 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곳곳에서 들려 왔다.
노동연구원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진영의 연구, 정책역량에 큰 힘이 되어 왔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개점휴업 상태이고, 한국노동연구원 중앙연구원의 박사급 상임연구위원이 5-6명에 불과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나마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공공서비스노조의 사회공공연구소,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금융노조 금융경제연구소 등도 상근연구인력이 5명 내외인 수준이다. 노동조합 가입률이 매년 떨어지고,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적 행태가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머리띠'를 둘러매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막상 임단협에서부터 각종 정책사안에 대한 입장발표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이 내세울 수 있는 치밀한 논리와 데이터, 정책대안들이 너무나 절실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연구소들의 현재 상황은 도저히 그런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되질 못하고 있다. 그나마 든든한 우군 역할을 해 주던 노동연구원의 파행과 위축은 '숫자와 논리'로 무장한 자본과 국가의 위력을 배가시킬 따름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노조가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직장 폐쇄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당시 박기성 원장이 사퇴하면서 파업은 마무리됐지만, 올 들어 해마다 맡던 사업에서 배제되면서 연구원이 해체 위기에 놓였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이런 와중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불신과 갈등은 약화보다 악화로 치닫고 있고, 민주노총 내의 '정파문제' 또한 쉽게 해소되길 바라기 어려운 지경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며 팔을 내휘두르며 노래를 불렀지만, 정작 노동운동, 노조운동, 노동자계급 내의 분열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듯 하다. 당장의 '통합'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지 않고서 현재의 국면을 이겨내기란 점점 어려워 보인다. 이런 와중에 흥미로운 한편의 글을 읽게 되었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이 발행하는 <노동저널> 2010년 6월호 에 실린 [오스트리아의 적극적 노동정책과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글이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인 어기구 박사가 쓴 글인데,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스트리아 사정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상당히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다소 길지만 논지를 왜곡하지 않기 위해 모두 인용한다).
"우리도 양대노총의 통합에 대하여 노조지도자들이 진지한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단일노조인 ÖGB 안에도 좌에서 우까지 5개 정파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있다. 하지만 이들은 민주주의 결정원칙에 따라 똘똘 뭉쳐 뺄셈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덧셈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볼 문제는 우리 노동조합의 정책역량에 대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우리 양대노총에는 이 부분이 매우 취약하다. 자본은 재벌들을 중심으로 각종 경제연구소들을 운영하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있고, 정부 역시 거대한 정책연구기관들을 각 부처마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는 이들과 대응할 수 있는 머리가 너무 부족하다. 요즘 한국노동연구원이 정부로부터 미운 오리털이 박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걸 다 안다. 정부가 싫으면 이 기회에 한국노동연구원을 양대노총의 정책연구기관으로 이전해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양대노총은 노동연구원을 통해 정책역량을 강화할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연구센터를 매개로 하여 양대노총이 통합의 길로 가는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노동회의소(AK)처럼 노동연구원을 통합노총의 씽크탱크로 자리매김 시키어 우리의 상공회의소와 함께 노사의 권익과 한국노사관계의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경험적 연구에 의하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나 오스트리아처럼 강한 노동조합이 있는 국가일 수록 갈등이 적다"(어기구, [오스트리아의 적극적 노동정책과 노동조합의 역할], <노동저널> 2010년 6월, pp.112-113)
물론 우리 정부가 한국노동연구원을 양대노총의 것으로 떼내어 줄 가능성은 거의 0%이다. 아마 없애면 없앴지 노동자들에게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해 수백억원이 드는 예산을 어디에서 마련하겠다는건가도 의문스럽다. 어기구 박사의 글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경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는 자율적 임의가입이지만 노동회의소에는 법률적으로 의무가입토록 되어 있고, 노동조합비는 임금의 1%, 노동회의소비는 0.5%를 내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노동자의 35%, 123만명 가량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으며, 노동회의소는 2008년의 경우, 330만명의 회원들로부터 3억4천 유로를 받아 회원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기반으로 노동회의소는 빈 본부에 600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100여명의 법률전문가들과 400여명의 노동, 경제, 경영, 정치 등 모든 분야의 전문연구자를 두고 연구와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을 정부가 양대노총에 떼 내어줄 가능성만큼이나, 노동자들이 내는 돈으로 엄청난 규모의 연구, 교육기관을 움직일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하지만 어기구 박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노사가 함께 조성하는 고용안전기금을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라고 제안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독일 상황은 약간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실제로 독일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는 독일 경제사회연구소(WSI)의 재원은 노동조합이 마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경영감사회 재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할만하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박명준 박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일의 기업법과 노동법상의 규정하에 대기업의 경영감사회에는 근로자 대표가 참석하도록 되어 있고, 이들은 대기업으로부터 일정한 액수의 활동비를 지원받는다. 감사회 구성원 가운데 노조원들은 그러한 명목으로 지급받는 돈을 한스 뵈켈러 재단에 전액기부하는 것이 관행이며, 이 돈은 한스 뵈켈러 재단 재정의 약 70%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를 이룬다. 2005/6 회계연도에 이 금액은 약 3천만 유로에 이르렀다. 독일 경제사회연구소의 재정은 바로 한스 뵈켈러 재단이 확보한 기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친노동자적 싱크탱크인 경제사회연구소는 일정한 제도의 그물망과 우회로를 거쳐 원래는 대기업이 벌어 들인 돈에 의하여 운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독일의 공동결정을 기초로 한 노동조합 대표의 경영참여의 제도가 경제사회연구소라고 하는 걸출한 노동문제 전문 싱크탱크의 존리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2005/6년 회계연도에 한스 뵈켈러 재단의 재정에서 경제사회연구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3.7% 가량되었고, 그 액수는 520만 유로에 이르렀다. 이는 경제사회연구소 전체 재정의 80-90% 가량을 차지하는 절대적인 부분이다."라고 한다(박명준, <후원하는 국가, 자율적인 사회 : 독일의 싱크탱크 체제와 한국적 함의>(가제), 근간)
40년전, 전태일 열사의 "대학생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함을 죄스러워하며 수많은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이 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과 함께 있어 줄 지식인 집단, 전문가 집단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 양대 노총이 만들고, 운영하는 제대로 된 연구소가 있다면 그 바람의 일부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최고 대학인 빈 대학 경제학 박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근무처가 노동조합 연구소라는 어기구 박사의 설명은 그래서 더욱 솔깃하다. 우리가 과연 "돈이 없어서" 그런 상황을 못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홍일표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