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착한경제] 한-EU FTA 읽는 법

HERI 2014. 11. 11
조회수 5024

등록: 2010.10.11 수정: 2014.11.11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했다. 언론에는 국책연구소 보고서를 인용한 전망이 넘쳐난다. 국민총생산(GDP)가 10년간 5.6%가 늘어난다는 둥, 무역수지 144억달러 흑자 효과가 있다는 둥 장밋빛 일색이다.


10년뒤 GDP 예측은 허망한 숫자놀음


사실, 경제 효과 예측이란 뜯어보면 매우 허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측은 몇 개의 자의적인 가정에서 출발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결과가 나오도록 가정을 덧붙여 숫자를 만들어 내기 일쑤다. 상식적인 가정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그래도 좀 나은데, 그래도 예측은 어렵다. 시장 참여자들이 연구자의 가정과는 달리 움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연구기관도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운데, 정부 정책 효과에 대한 국책연구기관의 예측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의 효과 예측, 특히 장기 효과 예측은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한 켠에서는 이런 예측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자의적인 가정을 덧붙여 숫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가정을 조금 바꾼다면 숫자는 모두 바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경제 예측 자체가 얼마나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의심을 가져볼 수도 있다. 경제는 역동적이다. 참여자들의 움직임에 따라 바뀐다. 참여자가 예측자가 미리 설정해 둔 것과 다른 기준에 따라 움직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심드렁하게 의미 없는 장기 예측 수치들을 지나친 뒤, 협정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랬더니, 분명 매우 큰 장기적 효과를 가져올 한 장이 있었다. 바로 13장,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조항이다. 미래의 수입과 수출에는 제품의 가격과 쓰임새 뿐 아니라, 생산 기업이 추구하는 사회적, 환경적 가치도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조항이다.


환경/노동권, 공정무역, 윤리적소비, 사회책임경영(CSR)을 강조한 무역협정


주목할 만한 표현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이번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에서 두 당사자는 '단순한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환경이 균형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지속가능발전의 목적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국제무역의 발전을 증진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협정문에는 서로의 노동이나 환경 기준을 적정한 선에서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환경 기준을 함께 강화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쓰여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노동 기준은 1998년 국제노동기구(ILO)의 선언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특정되어 있다. 1998년 국제노동기구 선언은,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강제근로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 철폐를 핵심노동기준으로 채택했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결사의 자유다.


한국 사회에는 결사의 자유에 대한 매우 큰 편견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 대표기업이 공공연하게 '비노조 경영'이라는 경영 방침을 내세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정도로 인식 수준이 낮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고 협상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유럽 문화와 대조적이다. 이런 한국 문화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새 무역 질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눈여겨볼 점은 환경 관련 제품에 대한 호의적인 약속이다. 친환경 제품은 다른 제품보다 우선적으로 관세를 철폐하겠다고 이 협정은 약속하고 있다. 또 환경기술제품과 재생가능한 에너지 제품, 에너지 효율적 제품 등에 대해서는 비관세 장벽 역시 우선 철폐하기로 약속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 사회책임경영(CSR)을 강조한 곳이었다. 두 협정 당사자는 협정문에 '공정무역'과 '윤리적' 제품 및 사회책임경영 기업 제품의 무역을 촉진하고 증진하기로 약속했다. 앞으로 생산자를 고려하는 공정무역 제품, 사회적 가치 실현을 경영의 주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 사회책임경영에 나서는 영리기업에게 더 큰 사업기회가 열릴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 기업, 시민사회 모두 개입과 대응 필요


이런 모든 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시민사회와 대화를 하고 감시를 받는 매커니즘을 도입할 것을 협정문에 명시한 것도 인상적이다.


시장은 제품과 서비스만 거래되는 곳이 아니다. 문화와 사회적 가치가 동시에 교류되는 곳이다. 시장의 통합은 가치와 문화의 통합도 수반한다.


자유무역협정에서도 사회적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대응에도, 사회적, 환경적 가치와 관련된 것이 더해져야 한다.


한 -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먼저 구매에 지속가능성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가격과 품질 이외에, 납품기업의 환경과 사회 기여도를 평가하는 '지속가능한 정부조달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사회적기업 제품, 공정무역 제품 등 환경 및 사회적 가치를 생각한 제품을 우대하는 공공기관 구매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더 많은 기업이 경제, 환경, 사회를 생각한 경영을 하도록 유도해야만, 지속가능발전을 고려한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틀 안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기업은 이제 사회책임경영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경제적 생존과 성장도 어렵게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일부 대기업의 활동이라고 여겨지던 사회책임경영활동이, 이제 수출하거나 수출기업에 납품하는 중견, 중소기업의 이슈로 확대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한-유럽 자유무역협정이 지속가능발전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실제 흘러가도록 이 의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무역은 관료와 기업의 일이라고 내버려 둘 일이 아니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문에서 보듯,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사회적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더 강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는다." (In the long run, we're all dead) 경제학자 케인즈가 '당장은 시장이 불균형 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 두면 장기적으로는 균형을 달성한다'고 주장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을 비꼰 말이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몇 % 성장 달성' 등의 예측을 내놓는 경제학자, 즉 이번에 FTA 보고서를 내놓은 분들을 비꼰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향후 10년 간의 국민생산 증가율을 예측한 국책연구소를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다.


장기적으로 볼 때, 국민총생산 성장률이나 무역흑자 예측은 모두 허망한 숫자놀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한국과 유럽연합의 약속은 장기적으로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장 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후손과 그들에게 물려줄 지구마저 죽여서는 안 된다. 10년 뒤 우리 소득이 1% 늘어날지 5%가 늘어날지보다는, 10년 뒤 우리가 어떤 사회, 어떤 환경 안에서 살게 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이번 협정 내용 중 가장 장기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칠,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조항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한겨레> 10월 9일치 '세상읽기'에 쓴 칼럼의 원본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 중국 기업가에게는 ‘원죄의식’이 있다

등록: 2010.11.26 수정: 2014.11.12 “중국 민간기업 경영자들과 얘기하다 보면 일종의 ‘원죄의식’ 같은 게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발판으로 사업을 일으키고, 법을 어겨가면서 돈을 번 어두운 기억 때문이죠...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85

[착한경제] 그 분이 오신다고요?!

등록: 2010.11.25 수정: 2014.11.12 대학시절, 함께 스터디를 하던 멤버 중에 똑똑하고 모범적인 선배가 있었습니다. 인자하고 현명해서 상담 신청을 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냥 정성껏 조언해주곤 했습니다. 머리도 좋아서 공부를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500

[착한경제] 한∙중∙일 기업은 서구보다 사회책임경영이 뒤떨어졌을까?

등록: 2010.11.23 수정: 2014.11.12 한겨레경제연구소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기업의 사회책임경영 연구를 벌써 3년째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말끔히 풀지 못한 의문이 있다. 늘 한국 언론과 기업들은 '서구에서...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39

[착한경제] 스트레스, 내 안을 보라

등록: 2010.11.22 수정: 2014.11.12 '아! 스트레스 받아' 직장인이면 일주일에 몇 번 쯤은 내뱉는 말이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세계 최고 수준인 나라에 살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필립스 헬스 앤 웰빙 지수’에 따르면 G20...

  • HERI
  • 2014.11.12
  • 조회수 4831

[착한경제] '벤처 박사' 안철수의 성공론

등록: 2010.11.18 수정: 2014.11.12 안철수(카이스트 석좌교수)는 올바른 사람이다. 그는 원래 올바른 창업가였다. 컴퓨터 바이러스백신이라는, 세상이 없던 제품을 만드는 '안철수연구소'라는 벤처기업을 세웠고, 성공시켰다. 편법 없...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47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사회적기업, 국제협력에 나서야 하는 이유

등록: 2010.11.18 수정: 2014.11.12 동아시아 3국(이하 한중일)은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다. 20세기 중반 패전국으로 대부분의 산업기반을 상실했던 일본은 높은 수준의 기술과 생산성에 기반한 성장을 거듭해 아시아의 거의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56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 사회적기업, 해외원조의 새로운 길

등록: 2010.11.18 수정: 2014.11.12 동아시아 3국(이하 한중일)은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다. 20세기 중반 패전국으로 대부분의 산업기반을 상실했던 일본은 높은 수준의 기술과 생산성에 기반한 성장을 거듭해 아시아의 거의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730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 더 나은 기업이 가능하려면

등록: 2010.11.17 수정: 2014.11.11 지난 주 열린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에 대해 논란도 많았지만, 나는 내심 기대를 갖고 있었다. 주요국 경영자들이 금융위기 이전의 과거 경영 관행에서 탈피하겠다는 반성이라도 하지 않을...

  • HERI
  • 2014.11.11
  • 조회수 4906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 장하준이 삼류 경제학자?

등록: 2010.11.16 수정: 2014.11.11 “삼류 잡지 에디터가 무슨 …” 장하준 교수(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에 대해 서울대의 한 교수가 던진 말이라 한다. ‘삼류잡지’란 장 교수가 한 때 편집자(editor)로 활동했던 ‘케임브리지 ...

  • HERI
  • 2014.11.11
  • 조회수 6195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한중일 미래 정책, 누가 이끌까?

등록: 2010.11.15 수정: 2014.11.11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적 가치와 질서, 비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중·일 싱크탱크의 역할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정책이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

  • HERI
  • 2014.11.11
  • 조회수 5304

[착한경제-아시아미래포럼] G20를 넘어서려면

등록: 2010.11.12 수정: 2014.11.11 10월 초, <조선일보> 1면을 보고는 큰 한숨을 쉰 일이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10월 '한중일 경제대전'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진행했습니다. 첫 회 제목은 이렇습니다. "1등 하던 造船業, 中에...

  • HERI
  • 2014.11.11
  • 조회수 5035

[착한경제] 독립성은 싱크탱크의 근본

등록: 2010.11.04 수정: 2014.11.11 이 글은 왕후이야오(王辉耀)가 상해금융법률연구원(上海金融与法律研究院)이 운영하는 <思想库>에 2010년 9월 7일자로 게재한 것이다(그러나 글이 쓰여진 시점은 2009년으로 보인다). <사상고>는 중국 ...

  • HERI
  • 2014.11.11
  • 조회수 5821

[착한경제] 김성근 리더십

등록: 2010.11.03 수정: 2014.11.11 경영학 책에서는 유능한 리더를 설명할 때,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설명하곤 한다. 이를 테면, 위기관리에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는 위기관리형 리더, 조직 구성원들에게 명확한 비전을 제시...

  • HERI
  • 2014.11.11
  • 조회수 5899

[착한경제] 중국 싱크탱크의 국제적 영향력(1)

등록: 2010.11.01 수정: 2014.11.11 이 글은 왕후이야오(王辉耀)가 상해금융법률연구원(上海金融与法律研究院)이 운영하는 <思想库>에 2010년 9월 7일자로 게재한 것이다(그러나 글이 쓰여진 시점은 2009년으로 보인다). <사상고>는 중국 ...

  • HERI
  • 2014.11.11
  • 조회수 6514

[착한경제] 무상급식과 엄마의 도시락

등록: 2010.10.29 수정: 2014.11.11 지난 6월 지방 선거를 뜨겁게 달궜던 무상급식에 대한 로드맵이 일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속속 발표되고 있다. 사회복지선진국이라 일컫는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선진국...

  • HERI
  • 2014.11.11
  • 조회수 5654

[착한경제] 사랑한다면 프랑스처럼

등록: 2010.10.21 수정: 2014.11.11 정부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프랑스 시위대에 고등학생들도 가세했다고 한다. 연금 받을 만큼 늙을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안 들 나이에 그런 정치의식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프...

  • HERI
  • 2014.11.11
  • 조회수 4687

[착한경제] ‘값싼 제품’의 위험한 진실

등록: 2010.10.15 수정: 2014.11.11 ‘값 싸고 질 좋은 상품’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지갑을 여는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얼마 전 이마트의 ‘싸고 큰 피자’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지난 8월 한 달 성수점에서만 6천개...

  • HERI
  • 2014.11.11
  • 조회수 4749

[착한경제] 대형마트 김치값이 오른 진짜 이유는?

등록: 2010.10.14 수정: 2014.11.11 편의점이나 대형 할인마트에서 파는 이른바 상품김치 가격이 올랐다. 회사별로 크게는 20%, 평균 10% 가량이 올랐다. 배추, 무, 고추 등 김치에 들어가는 식재료 가격이 적게는 두 배, 많게...

  • HERI
  • 2014.11.11
  • 조회수 5515

[착한경제] 노동연구원을 양대노총의 통합연구소로?

등록: 2010.10.14 수정: 2014.11.11 현 정부 들어 국책연구소의 독립성 훼손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정점에는 한국노동연구원의 파행이 있을 것이다. 노동연구원장의 '반노동자적' 발언과 행동들이 계속되었고, 연구원 노조와의 ...

  • HERI
  • 2014.11.11
  • 조회수 6911

[착한경제] 디지털 미디어와 화목하게 살려면

등록: 2010.10.12 수정: 2014.11.11 주말을 덕유산 자연휴양림에서 보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가기 힘든 오지의 대명사였던 무주구천동 부근의 숲 속에서 울창한 나무가 내뿜는 상쾌한 기운을 받으며 청명한 가을을 만끽했다. ...

  • HERI
  • 2014.11.11
  • 조회수 5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