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0.07.16 수정: 2014.11.10


결코 망하지 않을 기업이 갑자기 망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리먼브러더스가 그랬고, AIG가 그랬고, 엔론도 그랬다. 이들은 모두 CEO와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파산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문제는 그 판단을 내린 CEO나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이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멍청한 결정을 내릴까? 가장 똑똑한 명문학교 출신인 수많은 글로벌기업의 인재들은 왜 그렇게 많은 금융 스캔들을 일으키고 회사를 파산으로 몰아넣었을까? 왜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도, 현금이 풍부하고 안정된 기업의 CEO가 엉뚱한 사업에 투자해 돈을 날리는 일이 비일비재할까?


조직이론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본전 생각’을 거론한다.


‘본전 생각’이 인생 망친다


한국 주식투자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선천성 질병 가운데 하나는 ‘본전 의식’이다. 혹시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원금보다 값이 떨어진 주식은 절대로 팔 수 없다는 생각 탓에 주식이 휴짓조각이 될 때까지 들고 있다가, 값이 오르기 시작하면 원금을 회복하자마자 팔아치우고는 그 뒤 치솟는 주가를 보고 후회한 경험이 있으신지?


MIT 슬론 MBA과정 조직행동론 교수들의 연구에 따르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본전 생각은 한국 고유의 문화는 아니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똑똑한 MBA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윤리 스캔들을 일으킨 수많은 미국 글로벌 기업의 CEO와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탠포드 대학 MBA학생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항공기 개발 회사 최고경영자다. 올해 연구 자금 가운데 마지막 100만 달러(10억원)가 남아 있다. 새로운 ‘레이더 포착 회피형’ 전투기 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돼 있던 자금이다. 그런데 착수하려는 순간, 경쟁사에서 같은 분야에서 훨씬 좋은 기술로 같은 전투기를 개발해 발표하고 마케팅에 돌입했다. 계획대로 100만달러(10억원)를 항공기 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하겠는가?” 77%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같은 집단에게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1천만 달러(100억원) 짜리 항공기 개발 프로젝트가 90%진척됐다. 마지막 100만 달러(10억원)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순간, 경쟁사에서 같은 분야 훨씬 좋은 기술로 항공기를 개발해 발표해 버렸다. 남은 10%의 연구를 마치기 위해 자금을 투입하겠는가?” 43%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실 이 두 질문은, 똑같은 질문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판이한 결과가 나왔을까? 그것도 장래에 실제로 경영 의사 결정을 내릴 잠재 경영자 집단에서 말이다. 왜 똑똑한 이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응답을 한 걸까?


똑같이 “100만달러(10억원)를 낭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주 다른 두 개의 결과가 나온 까닭은 간단하다. ‘본전 생각’탓이다.


특정한 목표에 투자한 자원이 너무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투입이 잘못된 것이라는 새로운 정보가 입수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정보를 의심하며 기존 투자를 이어가려는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똑똑한 사람들의 반응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똑똑한 이들은 기존의 투자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하고, 새로운 정보의 효력을 약화시키는 증거를 찾아낸다.


사소한 정당화가 대형 스캔들로


이렇게 생겨난 ‘고의적인 오판’은 결국 의사결정권자들이 결과를 알면서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원인을 제공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고의적인 오판이 비윤리적 결정을 낳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목표에 대해 투입한 자원이 너무 많아 아깝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투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눈속임과 사소한 거짓말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소한 비윤리적 결정이 모이다 보면 머지 않아 거대한 스캔들과 법적 공방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매우 중요해 보이는 결정의 순간은 없다. 아주 사소한 정당화가 이어지면서 아주 큰 윤리 스캔들로 이어진다.


많은 회계부정 사건은 기업들의 ‘이익 관리’ (earnings smoothing)으로부터 시작된다. 간단히 설명하면 실적이 좋은 분기의 이익을 좀 깎아 실적이 좋지 않은 분기로 옮기면서 전체적인 이익 성장 곡선을 매끈한 곡선으로 만드는 게 이익 관리다.


이익 관리는 대부분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이뤄진다. 정말 좋은 회사인데 단 한 분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고 치자. 그 한 분기 때문에 주가폭락과 자금조달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면, 매출 결제 시기가 불분명하거나 다음 분기 초에 이뤄질 매출 결제분을 당겨 이번 분기에 이뤄진 걸로 발표하고 비용 계산은 좀 미뤄두는 게 낫지 않을까? 주가가 폭락하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주주와 직원들 모두 힘들어지지 않나? 그 동안 쏟아부은 임직원들의 땀과 주주들의 돈을 생각해 보라. 조금만 원칙을 어기면 그들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게 그 멋진 주주 중심주의 경영 아닌가?


이런 생각은 많은 기업들이 이익을 단순히 발표하는 게 아니라 관리하겠다고 나서게 했고, 결국 장부조작과 회계부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수많은 미국 경영자들이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장부상 비용은 대부분 추정치에 불과하다. 추정치는 항상 부정확하기 마련이다.” 이 말을 남긴 타이코는 2001년 엔론과 월드컴의 뒤를 따라 회계부정 혐의를 받은 데 이어 파산의 길을 걸었다. 어차피 추정치이기 때문에 조금 고치는 건 괜찮다는 생각이 낳은 결과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본전’은 경제학 용어로는 ‘매몰 비용’(sunk cost) 이 되는 셈이다. ‘본전 의식’이 의사 결정을 지배하는 경우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데드라인이 빠듯하게 정해져 있어 긴박하게 작업과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시간을 탓하며 자신의 오판을 정당화한다. 미래의 결과보다는 과거의 투자에 집착한다.


둘째는 공중에게 의사결정 과정이 지나치게 노출돼 있는 경우다. 다중의 눈치를 보는 리더는 이전의 잘못을 인정하고 방향타를 돌리기가 쉽지 않다.


셋째는 큰 노력에 견줘 가시적인 보상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경우다. 일은 힘드나 보상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덜 느끼기 때문에 결과보다는 ‘본전’에 집착한다.


똑똑한 당신은 이 세 가지에 해당하는 환경에서 일해본 일이 있는가? 열악한 환경을 탓하면서 본전만 챙기는 결정을 내려본 일이 있는가? 과거와 ‘본전’이 아니라 미래와 결과의 안테나를 켜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한, 당신도 언젠가 또 한 명의 “멍청한 결정을 내리는 똑똑한 리더"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 졸저 ‘MIT MBA 강의노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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