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곽노현(오른쪽 둘째) 서울시 교육감 후보가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진보진영 후보로 나선 교육의원, 연예인 권해효씨와 함께 손을 맞잡아 들어보이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등록: 2010.06.03 수정: 2014.11.10


2010년 6.2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 결과를 지켜보면서, 나는 두 번 놀랐다. 첫 번째 놀람은 이전까지의 여론조사 결과와 매우 다른, 야당 후보들의 약진 때문이었다. 두 번째 놀람은, 서울시 교육감으로 곽노현 후보가 당선됐다는 사실이다.

곽노현 당선자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교직과 공직을 두루 거친, 교육감으로는 무리가 없는 경력이다. 그런데 왜 그게 놀라움이었을까?


바로 개표 방송 시간 내내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던 수식어, '진보' 때문이었다.


"진보는 무능하다. 진보는 과격하다. 진보는 현실을 모른 채 이상만 이야기한다. 진보는 친북적이다. 진보는 좌파다. 진보는 보수 정권에 반대하는 것이다. 진보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최근 몇 년 동안 진보라는 단어에 붙인 딱지다. 그런데 그 모든 어려운 업보를 짊어지고도, 진보라는 단어는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화려하게 복권됐다. 그리고 곽노현 당선자가 그 선두에 서 있다.


진보(progress)라는 단어는 원래, 지금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협소한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분배주의만을 뜻하는 것도,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대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훨씬 더 넓고,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진보는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미래 인재를 준비하는 게 사명인, 교육에서 출발하는 게 자연스럽다.


삼성전자가 요구하는 미래  인재를 배출하라


진보의 원래 의미가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한국 교육이 왜 진보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은 아마도 최근 <한겨레> 에 실렸던 교육평론가 이범씨의 칼럼일 것이다. 메가스터디 등에서 유명 학원 강사로 맹활약하다가 최근에는 교육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의 글을 조금만 살펴보자.


"높은 경쟁강도와 사교육비를 수반하는 교육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출산율을 높이기란 불가능함이 명백한데도, 이들(우파)은 애써 이를 외면한다. 세계 꼴찌 수준인 현재의 출산율이 계속되어 고령화가 가속화된다면, 이삼십 년 뒤에는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간에 국가경제를 원활히 운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질 텐데 말이다."


"저개발국가로서 선진국을 추격할 때에는 주입식 교육, 정답 빨리 찾기 훈련이 나름 의미 있었을 것이다. 전 세계 업계에서 20등쯤 하고 있을 때에는 1, 2등 업체가 하는 게 정답이고, 이를 재빨리 모방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업종별로 1, 2등 하는 기업이 꽤 늘어났다. 이런 기업들은 ‘남들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창안하고 해내야 한다. 규격화된 정답을 제일 재빨리 찾아내는 학생들을 최고 엘리트로 인정해주는 교육이 기업 경쟁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진보진영은 사회의 반쪽을 대표하는 ‘저항세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출산율을 높여 장기적인 나라살림을 호전시키고, 삼성전자가 요구하는 미래의 창의적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포부를 가져야 한다."

(이범씨의 글, 교육감 선거와 진보의 포부 전문보기)


사회적 기업가 빌 드레이턴의 충고


2009년 가을에 만났던 미국 최고의 리더 25명 중 한 명이며 대표적 사회적기업가로 손꼽히는 빌 드레이턴 아쇼카 창립자도, 한국 경제와 한국 기업을 위해 왜 진보적인 교육이 필요한지를 역설했었다.


"20세기 경제를 끌고 온 모델은 미국의 포드 모델이었습니다. 포드자동차는 몇 명이 기획하고 디자인한 뒤 라인을 만들어 놓으면, 수만 명의 노동자가 그 기획에 맞춰 수동적으로 움직이며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드 모델은 죽음에 다다랐습니다. 한두 사람만 창조적이고 모두가 수동적이면서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을 갖는 일은 이제 불가능해졌습니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실리콘밸리의 명암을 보십시오. 포드와 지엠 등이 자리잡아 세계 최대의 자동차 도시였던 디트로이트는 이제 몰락한 대도시가 됐습니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기업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혁신성을 갖게 하는 생산 모델을 만들어 내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빌 드레이턴)


"문득 ‘1명의 리더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에서, ‘모든 사람이 혁신가인 사회’의 비전은 생뚱맞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도 혁신가의 정신이 필요한 것일까? 한국처럼 성장하고 있는 나라에서 혁신가의 정신은 왜 중요할까?" (이원재)


"모든 사람이 혁신가가 되는 일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기술의 경쟁 우위는 점점 더 줄어들 것입니다. 워낙 빨리 따라잡고 따라잡히니까요. 이제 사람의 경쟁 우위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창의성과 자기주도성이 중요해지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점점 커지고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 참여하지 않으면 죽지요. 디트로이트가 그렇게 된 겁니다." (빌 드레이턴)


(이원재의 글, 빌 드레이턴과의 대화 전문 보기)


반대하는 데서는 진보가 나오지 않는다


진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첫 번째는 정치사회적인 진보다. 민주화나 인권 신장이나 친환경적 사회를 만드는 일이 여기에 포함된다. 두 번째는 기술 진보다. 새로운 것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 그리고 미래를 통찰하는 것 역시 진보가 해야 할 일이다.


미국의 진보(progress)를 보면 배울 점이 있다. 끊임없이 그 개념을 재정의한다. 미국의 진보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대량생산 메커니즘을 만들어 지금은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 테일러리즘을 지지하기도 했었다. 교육 혁신도 앞장섰다. 생명과학에 대한 투자 등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앞섰다.


이 모든 것은, 진보가 보수에 반대되는 수동적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개념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새롭게 구축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실험이 바로 진보의 힘이었던 것이다.  미국진보센터 대표 존 포데스타가  (링크)"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3858" mce_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3858"><진보의 힘>(링크)에서 지적하고 있는 진보의 다양한 시도가 인상적이다. (한겨레경제연구소 이현숙 연구위원이 쓴 진보의 힘 소개글 참고)


진보는 용기 있게 미래를 개척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반대하는 데에서 진보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범 씨의 지적과 빌 드레이턴의 혜안은 인상적이다. 진보 교육감이 해야 할 일은 당장 우리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넣어 대학에 더 많이 보내는 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넣지 않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다.


진보 교육감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20년 뒤 삼성전자에, 한국의 대표적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내놓는 데 필요한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20년 뒤, 한국경제에 필요한 인재상은 무엇인가? 미래 기업에 필요한 인재의 두 가지 능력은 창조성과 사회적 책임이다. 그 두 가지를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 진보 교육감이 해야 할 일이다. 변화에 민감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사회적 의미를 찾는 노력을 병행하는 인재. 그게 바로 미래의 인재상이다.


곽노현 당선자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


"한국 경제의 10년 뒤 경쟁력은, 결국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갖춘 사람을 얼마나 많이 고용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면, 한국 경제는 앞으로도 문제없이 순항할 것이라고 봅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 결과가 확정되는 이 순간, 2009년 내가 들었던 빌 드레이턴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다행히도 곽노현 당선자는 한국 기업의 미래 경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비영리단체인 기업책임시민센터(CCSR)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책임경영(CSR)이 미래 기업의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던 사람이다. 또 한국CSR평가 이사회 의장을 맡아, 실제 사회책임경영을 잘하는 기업에 관심을 가진 글로벌 투자자들이 그런 기업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분석 데이터를 제공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다. '착한 기업'과 '투명한 경영'이 미래 기업 지속가능성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서울시의 교육에서부터, '진보'라는 단어가 새롭게 정의되기를 바란다. 진보가 구호를 외치는 일이 아니라 20년 뒤를 준비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줄 수 있는 서울 교육을 기대한다. 그가 공약으로 내세운 혁신 학교에 대해 더욱 큰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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