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0.05.24 수정: 2014.11.10


[동아시아 기업의 진화] 한·중·일 ‘하이브리드 경쟁력’ 세계경제 강타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근면하고 정확한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 제품이 맨 처음 미국 시장을 장악하더니, 그다음엔 빠르고 근성 있는 한국의 반도체와 휴대전화가 스멀스멀 시장을 장악해갔다. 그리고 이제 값싼 중국 제품이 전세계 모든 매장의 진열대를 서서히 점령하고 있다. 세계 역사를 새로이 써나가고 있는 ‘동아시아 기업’은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진화’하고 있을까? 가 창간 22돌을 맞아 한겨레경제연구소와 공동기획한 연재물‘동아시아 기업의 진화’는 그 생생한 현장 속에서 답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경제적 진화
적기생산·저마진 공략…
약점서 경쟁력 찾아내 고급화 전환에도 성공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업의 모습은 과거와 견줘 질적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미래에는 더욱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 칭화대학교. 이곳에서 중국 칭화대 연구진, 일본 호세이대 연구진, 한국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진이 한·중·일 기업의 사회책임경영을 함께 연구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세 나라 전문가들은, 단계와 규모는 다르지만 세 나라 모두에서 기업이 질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진화의 원동력은 한마디로 ‘융합’이다. 동양의 오랜 전통과 서양에서 정리된 표준의 융합, 그리고 공동체적 질서와 개인주의 정서의 융합이다. 진화의 내용은 경제적 진화, 사회적 진화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혁신’으로 성장한 동아시아 기업


동아시아 기업의 경제적 진화는 밑바닥에서 출발한 혁신에서부터 나왔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는 최근 ‘역혁신’(reverse innovation)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묘사했다.


역혁신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생산방식의 혁신인데, 약점에서 출발해 경쟁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처음 도입하기 시작한 적기생산방식(린생산방식·just-in-time)은 원래 땅값이 비싸 재고비용이 많이 드는 일본 제조업의 약점을 보완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후 전세계 경영학계가 ‘대량생산방식의 대안’이라고 칭송하는 방식이 됐다.


중국 소비자의 낮은 소득은 중국 기업이 비용절감을 통한 ‘저마진 대량 공급’ 전략을 채택하게 했다. 이 전략은 중국 제품이 전세계 할인점 진열대를 휩쓰는 이유가 됐다.


역혁신의 두번째 내용은 마케팅의 혁신이다. ‘피라미드 맨 아랫단’에 위치한 저소득 소비자층의 직접적 욕구에 민감한 제품과 가격을 설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 최대 컴퓨터 생산기업 레노버는 자신의 혁신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서구 기업처럼 추상적인 ‘꿈과 희망’을 주며 제품을 비싼 사치재로 포장하는 기업이 아니다.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을 필요한 만큼만 가능한 가격에 제공하는 기업이다.”


사회적 진화
사회책임경영 공동 협력
전통·서구특성 버무려내 질적 발전에 원동력으로


위로 달리는 수레바퀴


그렇다고 이들 기업이 밑바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할인점이 처음에는 저가로 진입하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고급화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경영학의 ‘소매업의 수레바퀴’ 이론은 동아시아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코로나로 시작해 작고 싼 자동차만 공급하는 듯하던 도요타는 렉서스 출시와 함께 포지셔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값싼 포니로 시작했던 현대자동차도 같은 길을 성공적으로 걷고 있다. 저가 컴퓨터 생산업체이던 레노버는 아이비엠(IBM) 피시(PC)부문 인수 뒤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얻었다. 값싼 텔레비전과 범용 디(D)램으로 시작한 삼성전자는 고급 브랜드로 변신중이다.


동아시아 기업에서 혁신은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아이디어의 발굴이라기보다, 소비자의 실용적 욕구를 채워주는 작은 개선의 모음에 가깝다. 이런 작은 개선들이 쌓인 곳에 연구개발을 덧붙이며 더 큰 혁신이 만들어진다. 그 결과 기술과 브랜드가 응축된 프리미엄 제품으로까지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사회책임(CSR), 공동의 질서로


사회책임경영(CSR)은 지금 전세계 기업의 주요 경영 열쇳말이다.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는 게 동서양을 막론한 합의점이다.


이 가운데 서구 선진국의 기업들은 먼저 성장한 뒤 그 부작용을 나중에 돌보는 식이다. 서구 자본주의가 완숙기를 구가하던 20세기 중후반까지도 서구 기업은 고속성장 일변도로 달려왔다. 성장세가 주춤한 최근에야 비로소 경제와 환경, 사회를 모두 고려해 기업을 경영해야 기업도, 사회도 지속가능하다는 믿음을 설파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 기업은 성장을 하는 와중에 환경과 사회를 챙기는 모양새다. 일본 기업은 경제성장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이미 환경경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중국 기업은 고속성장이 한창이던 2000년대 초반부터 사회책임경영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한국 기업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투명성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는 추세다.


이뿐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책임경영이 지역 내 협력의 중요한 매개고리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유엔글로벌콤팩트 한·중·일 라운드테이블이 열렸다. 세 나라 기업이 사회책임경영을 함께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일본 호세이대 에바시 다카시 교수는 “교류가 점점 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 사이에 공동의 질서가 필요한 시점이며, 사회책임경영은 중요한 공통 규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브리드가 경쟁력


동아시아 세 나라의 기업은 공통적으로 뿌리 깊은 사회문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서구 시장경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두 가지 특성이 뒤섞인 ‘하이브리드’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는 사회 전체 진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는 “동아시아 3국 사회에는 문화적 잠재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서, 서구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 공동체의식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전통을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이 공자를 만나고, 자유무역협정이 마오쩌둥(모택동)을 만나고, 교토와 개성의 상인정신이 반도체와 자동차에서 발현된다. 그게 동아시아 기업이다. 그들은 지금, 무서운 속도와 힘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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