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0.12.08 수정: 2014.11.12


정부대전청사에서 공무원 1천여 명이 한꺼번에 야외로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알고 보니 배수관 공사 중에 일어난 진동이었다. 마음 속에 뭉쳐 있던 불안이, 건물이 흔들리자 긴급 대피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는 모두 불안하다. ‘연평도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오래 갈 지도 모르겠다.


너그럽게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송년회 철인데, 여전히 삶은 전쟁이다. 회사 생활은 늘 경쟁자와 싸워야 하는 전쟁이다. 아이들 교육도 죽고 살기로 덤비는 전쟁이다. 여기다 포격이라니. 진짜 전쟁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불안마저 감돈다.


모두가 전쟁이다 보니, 진짜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지도 가물가물하다. 인명살상용 전쟁 장비가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하다. 호전적 기사와 칼럼이 주류 언론에 버젓이 등장한다. 알고 보면 불안에 떨며 외치는, 정제되지 않은 외마디일 뿐일지 모른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 몇 가지만 꼽아 보자. 우선 비즈니스가 전쟁이다. 대기업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느라 힘들다. 자동차 회사는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야 하고, 전자회사는 더 나은 스마트폰을 먼저 만들어내야 하고, 대형마트는 더 싼 피자를 더 많이 매장이 가져다 놓고 팔아야 한다. 1초라도 빠르고 1원이라도 값싼 제품만이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는 메시지를 모두가 되뇐다.


협력업체들은 더 힘들다. 대기업은 자꾸 납기를 당기고 가격을 낮추라 한다. 경쟁사는 점점 더 늘어난다. 당연히 직원 월급을 올려줄 수도 없다. 그래서 이제 괜찮은 청년들은 중소기업에서 일자리를 찾지 않는다. 악순환이다. 협력업체에 납품하는 2차, 3차 협력업체는 당연히 더 힘들다. 대형마트와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수퍼마켓들이나, 영세 납품업체들도 비슷하다.


힘들게 살다 보니, 사람들 서로도 더 강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너그럽기 어렵다. 자기 직장이 늘 불안한 줄 위에서 곡예 중이고, 자신의 미래도 불안한데, 왜 비정규직 이웃까지 챙겨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법하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실업자에게 너그럽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동네 수퍼마켓과 편의점 주인이 점원과 청년 아르바이트생에게 너그럽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경제는 성장해도 성장해도 행복과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기려고만 하면서, 결국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악마의 게임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게임은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꿈같은 이야기지만, 서로 조금씩 져 주는 것으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져 준다는 일은, 힘 있는 사람이나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매듭은 꼭대기에서 먼저 풀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 돌려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결국, 누군가에게는 더 힘 있는 사람이고 더 가진 사람이다.


대기업이 협력업체에게 조금만 져 준다면. 대기업이 조금 더 쳐준 기계값, 재료값으로, 협력 중소기업은 그 직원이나 2차 협력 중소기업 노동자의 삶의 질을 조금 더 높여줄 수 있다. 그렇게 생긴 여유로, 노동자는 윤리적이고 성실한 생산자에게 값을 조금 더 쳐주고 사는 소비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소비자를 보고, 유통업체는 좋은 납품업체와 지역 중소상인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러면 납품업체에서 일하는 정규직은 미래의 불안에 덜 시달릴 수 있고, 비정규직도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실업자에게도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같은 삶 속에서도, 여전히 송년회는 열릴 것이고 우리는 술잔을 부딪히며 일터와 아이들 교육과 부동산 시장과 정치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잔을 들어 건배할 것이다. 그 때, 이런 건배사를 함께 외쳐 보면 어떨까? ‘당’당하게, ‘멋’지게, ‘신’나게, ‘져’주자고.


“당.신.멋.져!”라고.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www.facebook.com/lee.wonjae.f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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