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0.11.17 수정: 2014.11.11
지난 주 열린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에 대해 논란도 많았지만, 나는 내심 기대를 갖고 있었다. 주요국 경영자들이 금융위기 이전의 과거 경영 관행에서 탈피하겠다는 반성이라도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와 호흡하는 미래형 경영에 나서는 초석 정도는 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G20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반성과 공동 대응을 위해 2008년 시작됐다. 그 틀 안에서의 첫 비즈니스 서밋이니, 반성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 내걸었던 4대 의제 중 하나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 제고'가 포함된 것은 내게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초청하려 했던 빌 게이츠가 참석하기 어려워졌고, 스티브 잡스도 오지 않는다는 소식에도 기대를 접지 않은 것은, 그 의제의 진지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B20에 실망한 이유
그런데 결과는 실망이다. 기업이 세계가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지,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 동아시아의 끄트머리에 있는 한국 기업이, 오늘날 기업이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저 날려 버린 셈이다. 회의 결과를 요약한 최종 성명서 내용은, 글로벌 금융위기 전 기업인들이 이익집단으로서 주장하던 내용으로 돌아가 있다.
무엇보다도 B20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질을 전혀 성찰하지 않고 있다. 위기의 본질은 탐욕에 기초한 시장 질서다. 위기의 원인은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부추긴 정부와 기업과 금융에 있다. 주요국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제의 새 틀을 짜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다.
비즈니스 서밋 결과 중에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우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문제다.
상생 문제의 핵심은, 대기업이 중소기업 물건을 공정한 가격과 공정한 방법으로 구매하지 않는 데 있다. 이번에 모인 기업가들은 대부분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다. 기업이 창출하는 부가 공급망을 통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현재의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대목을 스스로 내놓을 법도 했다.
그런데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만 나열한 뒤, 대기업 스스로의 역할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말았다. 대기업이 협력기업과의 상생을 위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렸다.
대중소기업 상생 과제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사실 한국에 특수한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상생을 강조하고 있기까지 하니 말이다. 한국보다 주주 입김이 더 강한 서구 기업에서는 공격적으로 제기하기 어려운 이슈다.
사실 상생 과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성명에 반영했다면, 한국 기업의 독특한 책임성을 세계에 알릴 수도 었다.
상생도 일자리도 뒷전
일자리 문제에서도 소극적 해법밖에 나오지 못했다. 기업이 성장한다고, 기술 혁신이 일어난다고 자동으로 괜찮은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안다. 대기업이 투자를 늘려도, 그 고용 효과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비즈니스서밋은 이 문제를 직면하지 않았다.
자유무역, 예비취업자 교육, 기술혁신 등으로 에둘러 언급했지만, 그 무엇도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없다. 녹색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시장을 형성해 주면 일자리를 창출해 보겠다는 태도다.
중소기업, 비영리부문, 사회적기업 등 글로벌 대기업 경영의 틀 바깥에서의 대안적 일자리 창출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언급했다면 그나마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을 것이다. 이런 대안을 이미 고민하고 있는 한국 기업도 있을 텐데 아쉽다.
전반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유엔에서 기존에 논의되던 수준보다 상당 부분 후퇴한 모습이고, 심지어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표현된 것보다도 뒤처진다. 인권, 노동, 반부패 같은 유엔글로벌콤팩트의 주요 의제에 대한 인식도 사라진 모양새다.
매킨지가 제시한 아득한 옛 패러다임
이번 비즈니스서밋은 경영컨설팅회사 매킨지가 맡아서 준비했다고 한다. 경영계의 '현자'처럼 군림하고 있는 매킨지는, 사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경영의 패러다임을 이끌었던 존재다. 그들이 이끈 포럼에서 아득한 옛날의 패러다임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은 결론이 나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근본적 성찰을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하지 않는 한, 근본적 해법은 나올 수 없다.
지금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문제를 성찰하려면, 금융위기 이전, 단기 이윤만을 생각하느라 노동과 환경을 생각하지 못했던 기업 경영의 사명을 반성했어야만 했다. 아무리 성장해도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구조을 인정했어야 했다. 소비자, 노동계, 학자,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 또는 기여하는 논의의 틀을 가졌어야 했다.
문제의 근본은, 경영의 출발점인 거버넌스와 사명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 기업의 사명은 무엇인가? 단기적 투자자들이 기업의 주인이고, 기업의 사명이 단기적 이윤의 극대화에만 있는 한 변화는 어렵다. 기업 사명의 변화가 일어나야, 더 나은 기업이 가능하다.
기업 사명의 담지자인 기업가가 바뀌어야 사명도 실질적으로 바뀐다. 즉 더 나은 기업은 더 나은 기업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더 나은 고민을 하는 사람 중에 더 나은 기업가가 나올 것이다. 시장 원리에 따라, 누군가는 더 나은 기업가가 될 것이고, 더 나은 기업을 만들 것이다. 문제는 누가 그 기업가가 되느냐다. 이번 비즈니스서밋 회의 내용만 보면, 그런 분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어려움이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고, 주요국들이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고, 컨설팅회사인 매킨지가 짜 온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기업가들은 그 내용을 고민해 바꾸기에는 너무 바빴을 것이고, 자기 회사의 이해관계에 관련 있는 조항이 있는지 검토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더 나은 기업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 나은 기업가가 없으면 더 나은 기업도 없다. 더 나은 세계에는 더 나은 기업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그 고민을 하지 않으면, 세계는 전진하지 못한다.
스무 개 나라의 기업가들은 또 만난다고 한다. 내년 프랑스에서다. 마음이 아프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이 의장국일 때 하지 못한 기업의 진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프랑스에서는 꼭 하시라고. 그러지 않으려면, 다시 모이지 마시라고.
* '2010 아시아미래포럼'에서는 사회책임경영(CSR)의 최신 트렌드와 아시아적 맥락의 기업 사회책임경영 방향을 논의합니다. 세부내용 확인 및 문의: www.asiafutureforum.org. 070-7425-5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