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조상들의 상부상조 전통 담긴 ‘공제’
정부·시장 주도 사회보장체계 형성되며 밀려나

2010년 소비자 생협 공제사업 법적 근거 마련에도
정부 무관심으로 10년간 발 묶여

소비자 피해 막기 위한 행정조처 등 마련해
국가가 책임지기 어려운 분야 메꿀 수 있게 해야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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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원시시대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서로 돕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이 아름다운 문화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 조상 전래의 계, 품앗이, 두레, 사창, 향약 등이 그 사례들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상부상조하는 이 멋진 전통은 일제 강점기와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공동체 정신이 배어있는 제도 하나는 유지되고 있다. 바로 공제(共濟)다. 공제란 함께 건넌다는 뜻이다.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하는 것. 그것이 공제의 철학이다.

산업혁명 시기 공제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영국이다. 국가에 의한 사회안전망이 만들어지기 전에,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던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조합을 만들어 운영했다. 유럽의 상호부조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공제조합(friendly society)이 노동조합과 사회보험의 뿌리였음을 알게 된다.

국가 주도의 사회보장체계가 형성되고 민간 보험사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공제는 뒤로 밀려나게 됐다. 국가와 시장이 각종 위험을 관리해주는 방식이 주류가 됐고, 민간의 자발적 공제는 보조적 수단으로만 남게 됐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 사이 공제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런데 최근 공제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자활기업, 사회적 경제 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활동가 단체 등 다양한 영역에서 기금이나 사회적 협동조합 형태로 공제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어서다. 무엇 때문일까? 세상살이가 힘들어져서 그들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작동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의 사회안전망이 무척 헐겁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나름 괜찮은 의료보험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실직하거나 중병에 걸렸을 때, 폐업 위기에 몰렸을 때, 준비 안 된 은퇴를 맞았을 때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너무 크다. 그리고 지금 이 땅의 많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플랫폼 노동자들이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망 사이로 추락하고 있다.

국가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리 목적의 보험회사가 사회·경제적 위험의 상당 부분을 다루는 현실에서, 국가가 책임지기 어려운 영역을 메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제조합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시민들을 지지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는 영리 보험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신뢰와 유대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공제조합은 색안경을 끼고 본다. 50년에 불과한 보험제도는 애지중지하면서 1천년이 훨씬 넘은 상호부조의 전통은 무시한다. 공제사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음에도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이 묶여 있는 생활협동조합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0년 3월, 관련법 개정을 통해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연합회는 회원과 회원에 소속된 조합원을 상대로 공제사업을 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자료 : 일반공제사업 규제의 합리화 방안(보험연구원, 2011)
자료 : 일반공제사업 규제의 합리화 방안(보험연구원, 2011)

하지만 생협의 공제사업이 추진되려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사업실시 방법 등에 대한 세부 규정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가 크고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정부와 생협 단체 간 갈등은 날로 험악해지고 있다.

의사, 교사, 택시, 버스, 건설업자, 부동산 중개사, 군인, 경찰, 지방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이미 많은 직업·직군 단체들이 개별 법률에 따라 공제사업을 하고 있다. 140만 가구가 넘는 생협 조합원은 연대의 끈으로 묶인 사람들이지 불특정 다수가 아니다.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관리 감독체계가 필요하면 행정조치를 마련하면 된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정부 당국의 처사는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이미 생명을 다한 신자유주의의 대안 중 하나로 사회적 경제를 이야기한다. 정부도 사회적 경제 영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다. 협동조합은 대표적인 사회적 경제 조직이다.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관계를 복구하는 힘은 연대와 협력의 힘에서 나온다. 공제는 그 살아있는 실험장이며 오래된 미래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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