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1.09.26 수정: 2014.11.12


‘경제위기'가 다시 입에 오르내린다. 원화 환율이 급상승하고, 주가는 요동을 친다. 대기업이 줄줄이 파산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1997~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국가마저 채무로 휘청이고 있다니 더 걱정이다.


낙관의 이유, 비관의 이유


하지만 나는 조심스레 낙관한다. 한국 기업은 이번 위기를 잘 방어할 것이다. 수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기둥은 어느 때보다도 튼튼하다. 수출증가율은 매월 20%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출 대상국도 진통 중인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신흥국이 4분의 3이나 된다.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소득은 여전히 급성장 중이다.
한국 기업은 이미 체계적 위험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먼브러더스 등 세계적 금융사들의 붕괴로 나타난 위기에서도 그랬다. 글로벌 기업들이 정신 못 차리고 흔들리던 그 때, 한국 기업의 수익성은 견실했다. 원자재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도, 수출길이 막혀 매출성장률이 낮아져도, 기업은 방법을 찾아내 이익을 냈다. 그만큼 영리하고 튼튼해졌다.

지금 위험한 것은 개인이다. 빈곤층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개인 금융부채는 2007년보다 32%나 늘어난 상태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행복도는 점점 떨어진다. 10여년 전만 해도 ‘경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꼽던 국민들은, 이제 ‘복지'와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복지와 삶의 질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뜻이다.

부실한 기업이 문제였던 과거 위기 때와 달리, 이번에는 부실한 가계가 경제의 약한 고리가 되리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문제가 생기면 여기가 시작점이다. 이번 위기는 기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을 직접 때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기업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향후 1~2년 동안은 한국사회가 대기업에게 그 활동의 사회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따져 묻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 동안 지배구조부터  전기값에 이르기까지 그만큼 보호해주며 키웠는데, 왜 홀로 건전성을 지키며 위험을 국민에게 전가하고 있는지 사회는 궁금해할 것이다.
결국 주주의 대리인으로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최근 10여년 동안의 기업 경영 원칙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 밖에 없다. 재무적 수익성 확보를 위해 쏟던 노력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 정당성을 얻는 데 쏟아야 할 것이다.

우선 개별기업 이익이 아니라 협력업체와 노동자를 포함한 생태계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경영의사결정 함수를 바꿔야 한다. 또 사회책임경영(CSR)을 홍보 도구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상 최고 의사결정기구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고르게 참여시키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예 사회적 사명을 띤 사회적기업도 더욱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위기는 가랑비처럼 온다


진짜 위기는 폭풍처럼 오지 않는다. 오래 내려 적시는 가랑비처럼 온다. 지금 오고 있는 가랑비는 ‘저성장'이라는 위기다. 단기적 시장 변화에는 기술적으로 대응하면 되지만,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위기에는 근본적 처방만이 효과를 가진다. 
프랑스 경제학자 클레망 쥐글라는 “불황의 유일한 원인은 번영이다”는 말을 남겼다. 사실 지금 세계경제 위기의 근원은 탐욕에 기인한 과생산과 과소비다. 후손들의 돈을 국가채무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많이 빌려와서 마구 써버린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고성장이 바로 저성장의 원인이다. 저성장 위기는 역설적으로, 성장 위주 대책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뜻이다.
위기의 본질은 많이 빌려 많이 쓸수록 더 행복해진다고 가르치던 ‘탐욕의 경제'가 이제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데 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은 이익을 내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투자하는 것이 늘 ‘선'인, 탐욕 위에 서 있는 경제체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더 많은 소비로 행복을 찾는 일은 지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250년 전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시장경제의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그 뒤 자본주의는 ‘탐욕의 윤리성'을 믿으며, 그 동력으로 경제를 성장시켰다. 한국경제도 오랜 기간 동안 기업의 탐욕이 선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용인했다. 그 시기가 저물고 있다.


탐욕의 시대에서 윤리의 시대로


저성장과 불안한 외부 환경은 이제 경제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결국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는 가운데, 더 큰 편익을 얻을 수 있는 체제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결국 지금까지 우리가 정의했던 '경제적'인 것에서 벗어난 편익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탐욕에 기초하지 않은 경제활동과 기업활동은 그 시작이다. 
이제 탐욕은 윤리적이지 않다. 진정 윤리적인 동기만이 윤리적이면서 곧 경제적인 시대가 오고 있다. 윤리적이고 이타적이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페이스북 www.facebook.com/lee.wonjae.fb

트위터 @wonjae_lee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착한경제] 그리스 총리 입만 보는 세계경제 - HERI 경제뉴스해설(11/4)

등록: 2011.11.04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총리, 국민투표 사실상 철회 먼 나라 그리스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글로벌 경제의 특징이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가 3일(현지시간) 제1야당인 신민당이 2차 구제금...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20

[착한경제] 내년 1분기 위기설 나온다 - HERI 경제뉴스 해설(11/3)

등록: 2011.11.03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사태 등으로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위기 국면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 몇 가지 좋지 않은 신호가 있다. 우선 그리스 불확실성이 커졌다. 우여곡절 끝...

  • HERI
  • 2014.11.12
  • 조회수 4781

[착한경제] 그리스 파산으로 가나 – HERI 경제뉴스해설(11/2)

등록: 2011.11.02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총리 국민투표 추진, 세계증시 급락 뉴욕증시가 급락했다. 그리스 총리가 돌연 유로화 사용국가의 2차 지원안에 대한 국민투표안을 들고 나오면서, 어렵게 마련한 지원안이 부결될 지...

  • HERI
  • 2014.11.12
  • 조회수 4866

내년 말 가계대출 대란 올까 - HERI 경제해설(10/31)

등록: 2011.10.31 수정: 2014.11.12 1. 내년 말 가계대출 대란 올까 경제력이 취약한 가계의 빚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한국은행이 30일 내놓은 ‘금융안정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 어떤 내용인가요...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19

[착한경제] 유럽의 아름다운 타협 - HERI 경제뉴스해설(10/28)

등록: 2011.10.28 수정: 2014.11.12 1. 유럽에서 온 좋은 소식 27일 새벽 4시(현지 시각, 한국 시각 27일 오전 11시) 벨기에 브뤼셀의 EU 정상회의 회견장에 기자들이 호출됐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유로화 사용 ...

  • HERI
  • 2014.11.12
  • 조회수 4513

[착한경제] 3분기 기업실적 악화 – HERI 경제뉴스 해설(10/27)

등록: 2011.10.27 수정: 2014.11.12 1. EU정상회의 결과가 나왔다면서요? 유럽연합(EU) 정상들이 26일(현지시간) 유럽 은행들의 자본을 9%로 확충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EU 정상들은 그러나 심야까지 회의를 거듭하면서도 그리스 국...

  • HERI
  • 2014.11.12
  • 조회수 4446

[착한경제] EU정상회담 어디로 갈까 – HERI 경제뉴스 해설(10월 26일)

등록: 2011.10.26 수정: 2014.11.12 1. 유럽연합 재무장관회의 취소, 뉴욕증시 하락 유럽연합 EU가 2차 정상회담 전 개최할 예정이던 재무장관회의를 취소했습니다. EU 집행위원회는 EU 정상들은 26일 열 예정이던 27개 EU 회원...

  • HERI
  • 2014.11.12
  • 조회수 4453

[착한경제] 신용카드 목장의 결투 – HERI의 경제뉴스 해설(10/25)

등록: 2011.10.25 수정: 2014.11.12 1. 신용카드 수수료 논란, 정부가 나서다 --- 신용카드 수수료율을 놓고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지요? 당국이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의 타당성을 재점검한다. 업계에서도...

  • HERI
  • 2014.11.12
  • 조회수 5324

‘안철수 현상’의 경제적 함의

등록: 2011.09.28 수정: 2014.11.12 안철수 신드롬의 경제적 함의 - ‘안철수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와 함께 읽다 * 이 글은 2011년 9월 29일 열리는 '안철수 현상과 한국사회'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817

[착한경제] 한국경제, 언제까지 국제금융가의 현금인출기 노릇을 할 것인가?

등록: 2011.09.26 수정: 2014.11.12 기원전 12세기 그리스가 ‘목마’라는 계책으로 10년 걸린 공성전을 마무리 한 트로이 전쟁은 경제가 발단이 됐다. 땅이 비옥하지 않은 그리스는 올리브와 포도나무 외에는 변변한 소출이 없었...

  • HERI
  • 2014.11.12
  • 조회수 4565

[착한경제] 경제위기, 낙관의 이유와 비관의 이유

등록: 2011.09.26 수정: 2014.11.12 ‘경제위기'가 다시 입에 오르내린다. 원화 환율이 급상승하고, 주가는 요동을 친다. 대기업이 줄줄이 파산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1997~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떠...

  • HERI
  • 2014.11.12
  • 조회수 4776

[착한경제] 구글도 애플처럼 닫힌 생태계를 향하나

등록: 2011.08.19 수정: 2014.11.12 구글의 모토롤라 휴대폰 사업 인수 발표가 화제다. 구글이 밝히고 있는 이 기업의 목표는 “전 세계 정보를 체계화하여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글은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37

[착한경제] ‘빈곤퇴치, 자립, 그리고 적극적 평화’ - 유누스 박사 강연

등록: 2011.08.18 수정: 2014.11.12 “We can create our own world as we want. It is a question of making up our mind. If we want to do it, it will get done.” - Muhammad Yunus (Aug 16, 2011, Seoul) 마이...

  • HERI
  • 2014.11.12
  • 조회수 5981

[착한경제] “재벌 2,3세들, 두려움에 떨고 있다”

등록: 2011.08.08 수정: 2014.11.12 2011년 8월 6일, MBC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에 출연했습니다. 주제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었습니다. 진행자인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과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07

[착한경제] ‘우리는 왜 사회적 기업을 원하는가?’

등록: 2011.08.05 수정: 2014.11.12 “정부나 대기업 지원에 대한 의존보다는 사회적기업의 창의성과 자발성, 사회적가치가 지속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국 사회적기업 운동의 선구자이자 소셜엔터프라이즈유럽(Social Enterprise...

  • HERI
  • 2014.11.12
  • 조회수 6903

[착한경제] 대지진 뒤 일본사회, 근본적 변화가 온다

등록: 2011.7.28 수정: 2014.11.12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덮친 대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일본 사회 근본적 변화의 촉발점이 됐습니다. 일본 최고 경제평론가이며 민주당 외교정책의 막후 브레인으로 불리는 테라시마 지...

  • HERI
  • 2014.11.12
  • 조회수 5865

[착한경제] 이건희 회장의 눈물과 평창

등록: 2011.7.26 수정: 2014.11.12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평창입니다.” 자크 로게 IOC위원장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는 순간, 한국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눈에 띄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눈물을 보...

  • HERI
  • 2014.11.12
  • 조회수 5120

[착한경제] GDP는 틀렸다

등록: 2011.7.13 수정: 2014.11.12 GDP는 틀렸다. 무슨 소리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GDP는 무조건 옳다고 배웠다. 내 나라를 자랑스러워할 때는 GDP 숫자를 따져 1인당 2만 달러가 넘었다느니, 세계 10위권에 들었다느니 하면서...

  • HERI
  • 2014.11.12
  • 조회수 7885

[착한경제] TV 맛집이 맛이 없는 이유

등록: 2011.6.30 수정: 2014.11.12 비 내리는 저녁, 혼자 광화문에 있는 극장 ‘스폰지하우스'를 찾아갔다. 화제의 영화 <트루맛쇼>를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됐다. “나는 티브이에 나오는 맛집이 왜 맛이 없는...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17

[착한경제] 카이스트의 연쇄 자살, 15년 전과 지금

등록: 2011.04.13 수정: 2014.11.12 카이스트에서 네 명의 학생이 연달아 자살한다. 세계적으로 촉망받던 교수 한 명도 자살한다. 학교 쪽은 상담과 심리치료 등의 제도 개선책을 내놓는다. 올해 이야기가 아니다. 1996년 봄 몇몇...

  • HERI
  • 2014.11.12
  • 조회수 5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