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착한경제] 기업에 혁명이 필요할 때

HERI 2014. 11. 12
조회수 5992

등록: 2011.02.24 수정: 2014.11.12


미국 유학 시절, 기숙사 근처의 친환경 유기농 마트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은 아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쌓여 있는 색색의 유기농 채소와 과일들, 진열대에 가득 찬 유기농 치즈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향긋한 냄새, 그리고 ‘365’브랜드가 붙어 있는 와인까지. 게다가 진열대에 놓여 있는 샐러드 드레싱이며 어린이 쿠키에는 ‘수익금의 몇 퍼센트는 환경과 어린이를 돕는 데 사용됩니다'라고 쓰여 있기 일쑤였다. 계산대 옆에는 인권이나 저개발국 빈곤 퇴치에 기부하자는 구호와 함께 팜플렛이나 동전함이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 곳에 가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가난한 유학생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들고 나오는 장바구니가 그리 무거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홀푸드마켓은 방문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그리고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착해진 기분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주말 오후의 쇼핑에서 값싼 점포브랜드(PB) 와인 한 병과 치즈 한 조각만 사더라도, 저녁이면 그 와인을 따르면서 그 날의 쇼핑을 회고하며 지구의 미래에 대해 멋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마트였다.


세븐스 제너레이션(Seventh Generation)은, 우리가 그 홀푸드마켓의 진열대에서 발견한 보물같은 세제 브랜드였다. 초록색 숲이 포장 전면에 가득한 모양부터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지구를 생각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는 기업'이라는, 그 포장에 쓰여 있는 문구까지. 한 마디로 우리에겐 매력투성이인 브랜드였다. 나는 한참을 진열대 앞에 서서, 그 제품을 들고 포장을 찬찬히 뜯어보곤 했다.


<책임 혁명>을 펴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저자 제프리 홀렌더의 이름이었다. 그는 세븐스 제너레이션의 공동 설립자 겸 회장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던 시기부터 ‘사회책임기업’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사회적 사명을 실천하겠다고 나선 기업의 설립자다.


설립 때부터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온갖 비웃음을 사면서 표백하지 않은 재생 폐휴지로 티슈를 만들어 팔면서, 소비자들에게 솔직하게 그 사실을 알렸다. 자신들이 파는 제품을 스스로 비판하고, 최고경영진 연봉 총액이 비간부 전체 직원 연봉의 14배를 넘지 못하게 스스로 제한했다.제품 광고 대신, 통신판매 카탈로그 표지에 진보적 정치인인 빌 클린턴과 앨 고어 얼굴을 넣어 공개 지지를 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기업보다는 활동가에 가까웠다. 그게 벌써 20년 전이었다. 그 때 제프리 홀렌더는 선지자이면서 선지자였다.


그리고 CSR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입에 오르내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는 선지자이면서 선도자다. 대기업들이 이익의 1%를 사회에 내놓는다고 젠체하며 1%클럽을 만들고 있을 때,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이익의 10%를 비영리기관에 기부하는 파격적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이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 만족시켜줘야 한다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을 때, 세븐스 제너레이션은 ‘소비자가 의식을 갖고 소비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 변화시키겠다’는 대담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한다.


이 책, <책임혁명>은 그 정점에 서 있다. 그는 이제 혁명을 말한다. 정치권력을 민주적으로 바꾸는 정치혁명이 아니다. 구세대의 악습을 없애자는 문화혁명도 아니다. 바로 그가 서 있는 땅, 기업이라는 곳에서 일어날 혁명을 이야기한다.


그의 혁명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는 더 이상 기업 책임과 관련해 그 동안 해온 식으로 점진적 개선, 미세조정, 안이한 업그레이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점진적인 접근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기업들이 말로는 기업 책임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는 활동이 사회에 손상을 주고 환경을 훼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중요한 것은 그저 주가 상승과 경영진의 자리 보존 뿐이었다. 소수의 이익이 다수의 복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우리는 그런 낡은 정신 모델이 조만간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대기업 경영자들은 명절이면 달동네에 가서 연탄을 나르거나 보육시설을 방문해 아이들을 안아주고는 사진을 찍어 보도자료와 함께 배포한다. 현란한 명칭의 관련 협정과 국제기구에도 점점 더 많이 가입한다. 회사의 환경, 인권, 노동, 지역사회 공헌, 제품 책임 등을 명시한 CSR보고서도 점점 더 많이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허전하다. 이걸로 충분한 걸까?


여기에 단호하게 ‘No’라고 말하는 게 바로 이 책이다. 기업의 책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명이다.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느냐다.


인류가 기후변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저개발국에 빈곤이 사라지게 하는 데, 소비자가 환경과 사회에 이익이 되는 제품을 더 많이 소비하고 그렇지 않은 제품을 사지 않도록 이끄는 데, 그 사명이 있어야만 진정한 사회책임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게 없다면, 다른 것은 가식일 뿐이다.


제프리 홀렌더는 그래도 변화의 싹을 본다. 자신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븐스 제너레이션 같은 기업도 있다. 단기 재무성과 대신 지속가능한 가치를 추구하는 막스&스펜서 같은 기업도 있다. 정직과 투명성을 앞세우는 ‘파타고니아’ 같은 기업도 있다. 인권 스캔들을 겪고는 반성하면서, 구성원 전체가 세상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는 기업으로 변모한 나이키 같은 기업도 있다.


기업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게 변화다. 그래서 지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사회의식을 질문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40년 전, 한국 기업은 정부를 계획에 맞추기 위해 경영되어야 했다. 20년 전, 한국 기업은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했다. 지금, 한국 기업은 주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고 있다. 20년 뒤 한국 기업은, 무엇을 위해 경영되어야 할까?


단 한 가지 질문. 당신은 무엇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가? 그 대답이 혁명을 맞고 있다. ‘책임 혁명’은 바로 그런 혁명이다. 20년 뒤에도 성공적인 기업을 만들고 싶다면, 그 혁명의 내용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몰라서는 곤란하다.


오늘 밤 와인을 딸 때는, 그 와인이 유기농 와인인지를 먼저 묻자. 모닝 커피를 탈 때는, 이 커피가 공정무역 커피인지를 묻자. 그게 20년을 앞서가는 제프리 홀렌더와 호흡을 맞추기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www.facebook.com/lee.wonjae.fb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착한경제] 그리스 총리 입만 보는 세계경제 - HERI 경제뉴스해설(11/4)

등록: 2011.11.04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총리, 국민투표 사실상 철회 먼 나라 그리스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글로벌 경제의 특징이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가 3일(현지시간) 제1야당인 신민당이 2차 구제금...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29

[착한경제] 내년 1분기 위기설 나온다 - HERI 경제뉴스 해설(11/3)

등록: 2011.11.03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사태 등으로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위기 국면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 몇 가지 좋지 않은 신호가 있다. 우선 그리스 불확실성이 커졌다. 우여곡절 끝...

  • HERI
  • 2014.11.12
  • 조회수 4797

[착한경제] 그리스 파산으로 가나 – HERI 경제뉴스해설(11/2)

등록: 2011.11.02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총리 국민투표 추진, 세계증시 급락 뉴욕증시가 급락했다. 그리스 총리가 돌연 유로화 사용국가의 2차 지원안에 대한 국민투표안을 들고 나오면서, 어렵게 마련한 지원안이 부결될 지...

  • HERI
  • 2014.11.12
  • 조회수 4878

내년 말 가계대출 대란 올까 - HERI 경제해설(10/31)

등록: 2011.10.31 수정: 2014.11.12 1. 내년 말 가계대출 대란 올까 경제력이 취약한 가계의 빚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한국은행이 30일 내놓은 ‘금융안정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 어떤 내용인가요...

  • HERI
  • 2014.11.12
  • 조회수 4633

[착한경제] 유럽의 아름다운 타협 - HERI 경제뉴스해설(10/28)

등록: 2011.10.28 수정: 2014.11.12 1. 유럽에서 온 좋은 소식 27일 새벽 4시(현지 시각, 한국 시각 27일 오전 11시) 벨기에 브뤼셀의 EU 정상회의 회견장에 기자들이 호출됐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유로화 사용 ...

  • HERI
  • 2014.11.12
  • 조회수 4527

[착한경제] 3분기 기업실적 악화 – HERI 경제뉴스 해설(10/27)

등록: 2011.10.27 수정: 2014.11.12 1. EU정상회의 결과가 나왔다면서요? 유럽연합(EU) 정상들이 26일(현지시간) 유럽 은행들의 자본을 9%로 확충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EU 정상들은 그러나 심야까지 회의를 거듭하면서도 그리스 국...

  • HERI
  • 2014.11.12
  • 조회수 4460

[착한경제] EU정상회담 어디로 갈까 – HERI 경제뉴스 해설(10월 26일)

등록: 2011.10.26 수정: 2014.11.12 1. 유럽연합 재무장관회의 취소, 뉴욕증시 하락 유럽연합 EU가 2차 정상회담 전 개최할 예정이던 재무장관회의를 취소했습니다. EU 집행위원회는 EU 정상들은 26일 열 예정이던 27개 EU 회원...

  • HERI
  • 2014.11.12
  • 조회수 4469

[착한경제] 신용카드 목장의 결투 – HERI의 경제뉴스 해설(10/25)

등록: 2011.10.25 수정: 2014.11.12 1. 신용카드 수수료 논란, 정부가 나서다 --- 신용카드 수수료율을 놓고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지요? 당국이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의 타당성을 재점검한다. 업계에서도...

  • HERI
  • 2014.11.12
  • 조회수 5330

‘안철수 현상’의 경제적 함의

등록: 2011.09.28 수정: 2014.11.12 안철수 신드롬의 경제적 함의 - ‘안철수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와 함께 읽다 * 이 글은 2011년 9월 29일 열리는 '안철수 현상과 한국사회'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823

[착한경제] 한국경제, 언제까지 국제금융가의 현금인출기 노릇을 할 것인가?

등록: 2011.09.26 수정: 2014.11.12 기원전 12세기 그리스가 ‘목마’라는 계책으로 10년 걸린 공성전을 마무리 한 트로이 전쟁은 경제가 발단이 됐다. 땅이 비옥하지 않은 그리스는 올리브와 포도나무 외에는 변변한 소출이 없었...

  • HERI
  • 2014.11.12
  • 조회수 4569

[착한경제] 경제위기, 낙관의 이유와 비관의 이유

등록: 2011.09.26 수정: 2014.11.12 ‘경제위기'가 다시 입에 오르내린다. 원화 환율이 급상승하고, 주가는 요동을 친다. 대기업이 줄줄이 파산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1997~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떠...

  • HERI
  • 2014.11.12
  • 조회수 4781

[착한경제] 구글도 애플처럼 닫힌 생태계를 향하나

등록: 2011.08.19 수정: 2014.11.12 구글의 모토롤라 휴대폰 사업 인수 발표가 화제다. 구글이 밝히고 있는 이 기업의 목표는 “전 세계 정보를 체계화하여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글은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45

[착한경제] ‘빈곤퇴치, 자립, 그리고 적극적 평화’ - 유누스 박사 강연

등록: 2011.08.18 수정: 2014.11.12 “We can create our own world as we want. It is a question of making up our mind. If we want to do it, it will get done.” - Muhammad Yunus (Aug 16, 2011, Seoul) 마이...

  • HERI
  • 2014.11.12
  • 조회수 5988

[착한경제] “재벌 2,3세들, 두려움에 떨고 있다”

등록: 2011.08.08 수정: 2014.11.12 2011년 8월 6일, MBC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에 출연했습니다. 주제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었습니다. 진행자인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과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12

[착한경제] ‘우리는 왜 사회적 기업을 원하는가?’

등록: 2011.08.05 수정: 2014.11.12 “정부나 대기업 지원에 대한 의존보다는 사회적기업의 창의성과 자발성, 사회적가치가 지속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국 사회적기업 운동의 선구자이자 소셜엔터프라이즈유럽(Social Enterprise...

  • HERI
  • 2014.11.12
  • 조회수 6910

[착한경제] 대지진 뒤 일본사회, 근본적 변화가 온다

등록: 2011.7.28 수정: 2014.11.12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덮친 대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일본 사회 근본적 변화의 촉발점이 됐습니다. 일본 최고 경제평론가이며 민주당 외교정책의 막후 브레인으로 불리는 테라시마 지...

  • HERI
  • 2014.11.12
  • 조회수 5873

[착한경제] 이건희 회장의 눈물과 평창

등록: 2011.7.26 수정: 2014.11.12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평창입니다.” 자크 로게 IOC위원장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는 순간, 한국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눈에 띄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눈물을 보...

  • HERI
  • 2014.11.12
  • 조회수 5126

[착한경제] GDP는 틀렸다

등록: 2011.7.13 수정: 2014.11.12 GDP는 틀렸다. 무슨 소리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GDP는 무조건 옳다고 배웠다. 내 나라를 자랑스러워할 때는 GDP 숫자를 따져 1인당 2만 달러가 넘었다느니, 세계 10위권에 들었다느니 하면서...

  • HERI
  • 2014.11.12
  • 조회수 7893

[착한경제] TV 맛집이 맛이 없는 이유

등록: 2011.6.30 수정: 2014.11.12 비 내리는 저녁, 혼자 광화문에 있는 극장 ‘스폰지하우스'를 찾아갔다. 화제의 영화 <트루맛쇼>를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됐다. “나는 티브이에 나오는 맛집이 왜 맛이 없는...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22

[착한경제] 카이스트의 연쇄 자살, 15년 전과 지금

등록: 2011.04.13 수정: 2014.11.12 카이스트에서 네 명의 학생이 연달아 자살한다. 세계적으로 촉망받던 교수 한 명도 자살한다. 학교 쪽은 상담과 심리치료 등의 제도 개선책을 내놓는다. 올해 이야기가 아니다. 1996년 봄 몇몇...

  • HERI
  • 2014.11.12
  • 조회수 5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