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1.02.09 수정: 2014.11.12


자동차가 달리려면 기름을 넣어야 한다. 그러나 기름만 넣는다고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빠르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움직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더욱 생각할 것이 많다. 차체가 튼튼하고 안전해야 하고, 운전기사도 유능하고 선량해야 하며, 지도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내기도 해야 한다. 나를 잘 모시겠다면서 기름만 찾고 있는 운전기사는 어쩐지 불안하다.


요즘 보편적 복지와 재정을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며 받는 느낌이다.


‘의무급식'에서 시작해 ‘무상의료', ‘무상보육' 등 보편적 복지 정책과 관련된 논쟁이 한창이다. 그리고 그 논란의 축은 이제 ‘돈'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보편적 복지를 하려면 재정이 많이 드는데, 그러려면 돈을 써야 하는 국가가 기존 재정을 아끼거나 세금을 더 거두어 재정 여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렇게 해서 국가가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하게 하면, 복지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마련하는 게 가장 중요하게 보인다.


나는 한국사회에 복지가 늘어나야 하고, 가능하면 그 복지는 보편적 성격이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 논의가 국가의 재정과 역할에 대한 것으로만 집중되는 것은 어쩐지 불편하다.


복지재정 논쟁에 대한 나의 불편함 속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사고방식의 문제다. ‘재정’은 ‘복지’라는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한 ‘투입’이다. 재정 논쟁에 빠지다 보면 자칫 투입 중심 사고에 빠질 수 있다. ‘복지’라는 최종 성과를 중심에 놓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좋은 정책을 설계할 수 있다.


지금도 정부는 몇 조 원을 들여서 사업을 벌인다고 발표하면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그 돈이 원래 목적한 성과를 얼마나 냈는지는 감감 무소식인 경우가 흔하다. 복지 재정을 확충해 복지국가를 만들더라도, 이런 투입 중심 사고방식이 성과 중심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그 재정이 실제 성과인 ‘복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역할 분담의 문제다. 복지는 국가의 것만은 아니다. 기업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함께 생각해야만 논리가 완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중소기업 임직원들의 복지는 납품 대기업과의 거래관계를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해 원가를 절감하면, 대기업이 납품가격을 더 깎아 버리고 기술까지 가져가곤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지는, 일자리의 불안정성을 빼 놓고는 말할 수 없다.


국가의 복지정책을 통해 사회임금이 늘어나더라도, 시장은 이 증가분을 언제든 도로 빼앗아 올 수 있다. 복지국가에서도 복지는 지체되거나 오히려 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충분히 인식되고 실행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시민사회의 역할도 매우 크다. 기업이 책임 있게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깨어 있는 소비자와 투자자다. 이들이 책임 있는 기업에 투자하고 그 물건을 구매할 때, 기업은 변화한다. 이들을 깨우는 게 바로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시민사회가 직접 만드는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 사명 중심 기업 역시 기업의 변화를 견인할 수 있다.


셋째, 전략의 문제다. 사업에는 늘 공감이 먼저다. 돈은 나중이다. 어떤 위대한 사업도 재정계획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먼저 뛰어들고, 헌신하고,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 다음, 투자자와 후원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돈이 모였고, 성과를 증폭시킬 수 있었다.


보편적 복지는 이제 막 국민들에게 소개됐다. 이게 왜 중요한지에 대한 공감을 얻는 게 먼저다. 누군가 뛰어들어서 그 비전으로 국민을 먼저 감동시켜야 한다. 돈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는 것은, 스스로 확신이 부족하다는 인상만 증폭시킨다.


지금의 복지 논쟁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정의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대접에 대해 사회 전체가 토론하고, 서로 공감과 합의를 만들어내는 장이 건국 이래 최초로 열린 셈이다. 그래서 더욱 정교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곤란하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싱크탱크 시각] 주거불안 이대로 방치할 건가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미친 전셋값’ 소식에 불안했다. 내년 초 전세 만기라 걱정거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며칠 전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시세대로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한다. 2년 전에 견줘 ...

  • admin
  • 2014.12.08
  • 조회수 6705

[싱크탱크 시각] 결혼식 ‘치킨게임’ 어떻게 멈출까?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가을은 결혼의 계절이다. 어김없이 날아드는 청첩장이지만, 인생의 새 출발을 기약하는 낯익은 얼굴들을 보면 괜스레 설렘과 기대, 희망 같은 것이 시나브로 피어난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가보면 결혼식...

  • admin
  • 2014.11.17
  • 조회수 8069

[착한경제] 월가, 이제 샴페인을 딸 때

등록: 2013.06.04 수정: 2014.11.12 미국에서도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면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 기업인들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대통령의 개혁을 저지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체제를 만들려 했다. 이 음모가...

  • HERI
  • 2014.11.12
  • 조회수 7322

[착한경제] 사회적 경제의 오래된 가치

등록: 2013.05.21 수정: 2014.11.1299%의 경제아하! 협동조합언젠가부터, 경제는 이윤 동기로만 작동한다는 고정관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승자독식은 시장을 굴러가게 하는 불가피한 요소라는 믿음에서 우리의 의식은 자유롭지 ...

  • HERI
  • 2014.11.12
  • 조회수 5187

[착한경제] 사회의 귀환

등록: 2013.04.12 수정: 2014.11.1299%의 경제 HERI의 시선사람은 그가 한 말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기도 한다. 며칠 전 타계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도 오래 기억될 말을 남겼는데, 바로 “사회, 그런 것은 없습니다”...

  • HERI
  • 2014.11.12
  • 조회수 5363

[착한경제] 진정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록: 2013.02.01 수정: 2014.11.12 99%의 경제 HERI의 시선 올해 신년사에서 주요 대기업 총수들은 유독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저마다 사회적 책임 방안을 내놓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난 연...

  • HERI
  • 2014.11.12
  • 조회수 5299

[착한경제] 누구도 비정규직을 도와주려 하지말라!

등록: 2012.11.07 수정: 2014.11.12 샘물은 위에서 살살 걷어서 먹어야 한다. 휘저어 놓으면 그나마 아무도 못먹는다. 무엇이든 어설프게 하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정치권에서 앞다투어 약속하는 비정규직 보호 또는 철폐 약...

  • HERI
  • 2014.11.12
  • 조회수 5829

[착한경제] 사회적기업 장수의 비결, 지식창조 메커니즘

등록: 2012.09.11 수정: 2014.11.12 지속가능성을 위한 사회적기업의 혁신 사회적기업은 일반 기업이 경영 효율성을 이유로 외면하는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거나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안...

  • HERI
  • 2014.11.12
  • 조회수 6283

[착한경제] 한국 양궁 성공신화의 비밀

등록: 2012.08.08 수정: 2014.11.12 1980년대 초 어느 날,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당시 삼익악기 양궁선수단 감독)는 연습장 앞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양궁이 늘 이렇게 재미없는 스포츠로만 남아 있을까? 그...

  • HERI
  • 2014.11.12
  • 조회수 10048

[착한경제-2012년 풀뿌리사회적기업가학교 수료식]

등록: 2012.07.11 수정: 2014.11.12 [2012년 풀뿌리사회적기업가학교 수료식] 3개월을 함께 한 (예비)사회적기업가들의 축하의 장 착한경제를 만들어 갈 사회적기업가로서의 감성과 지성을 일구어 온 ‘2012년 풀뿌리사회적기업가학교’...

  • HERI
  • 2014.11.12
  • 조회수 6655

[착한경제] 진보가 집권한 프랑스, ‘올랑드 솔루션’은 어떤 모습일까

등록: 2012.05.08 수정: 2014.11.12 당선되자마자 "긴축은 더이상 우리의 운명일 필요가 없다. 특히 독일에 하고 싶은 말”이라고 쏘아붙인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는 앞으로 유럽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올랑드 입장에서...

  • HERI
  • 2014.11.12
  • 조회수 5134

[착한경제] 지구온난화에 스핀(spin)을 거는 사람들

등록: 2011.12.20 수정: 2014.11.12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국제 공조의 틀인 ‘쿄토의정서’가 휴지가 될 운명에 놓였다고 한다. 12월 중순 남아공화국 더반 총회 직후 캐나다가 탈퇴를 선언했고, 일본과 러시아도 심상치 않다. ...

  • HERI
  • 2014.11.12
  • 조회수 6119

[착한경제] Being Socially Prepared is the Key Success Factor in Community Based Development – Interview with Tri Mumpuni

등록: 2011.11.09 수정: 2014.11.12 Tri Mumpuni, the one of the 2011 Magsaysay Awardees, has been proposing an innovative model, the hybrid model, to solve Asia's pertaining issues such as poverty, energy, ...

  • HERI
  • 2014.11.12
  • 조회수 31257

[착한경제] SK 검찰 수사 경영 영향 – HERI 경제뉴스해설(11/9)

등록: 2011.11.09 수정: 2014.11.12 1. SK 최태원 회장 검찰 수사 검찰이 최태원(51) SK그룹 회장과 동생인 최재원(48) 수석부회장이 1천억원이 넘는 회삿돈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검찰이 어제 이런 혐...

  • HERI
  • 2014.11.12
  • 조회수 5314

[착한경제] 아이폰 1대당 이익이 삼성 스마트폰의 3배-HERI 경제뉴스 해설(11/8)

등록: 2011.11.08 수정: 2014.11.12 1. 한국 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에 대한 국가신용등급을 기존 `A+`로 유지하고 등급전망을 ‘긍정적’으로 높인다고 밝혔다. 큰 변화가 없다면 1년 안에 한국 국가...

  • HERI
  • 2014.11.12
  • 조회수 5649

[착한경제] 그리스 총리 입만 보는 세계경제 - HERI 경제뉴스해설(11/4)

등록: 2011.11.04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총리, 국민투표 사실상 철회 먼 나라 그리스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글로벌 경제의 특징이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가 3일(현지시간) 제1야당인 신민당이 2차 구제금...

  • HERI
  • 2014.11.12
  • 조회수 4826

[착한경제] 내년 1분기 위기설 나온다 - HERI 경제뉴스 해설(11/3)

등록: 2011.11.03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사태 등으로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위기 국면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 몇 가지 좋지 않은 신호가 있다. 우선 그리스 불확실성이 커졌다. 우여곡절 끝...

  • HERI
  • 2014.11.12
  • 조회수 4989

[착한경제] 그리스 파산으로 가나 – HERI 경제뉴스해설(11/2)

등록: 2011.11.02 수정: 2014.11.12 1. 그리스 총리 국민투표 추진, 세계증시 급락 뉴욕증시가 급락했다. 그리스 총리가 돌연 유로화 사용국가의 2차 지원안에 대한 국민투표안을 들고 나오면서, 어렵게 마련한 지원안이 부결될 지...

  • HERI
  • 2014.11.12
  • 조회수 5094

내년 말 가계대출 대란 올까 - HERI 경제해설(10/31)

등록: 2011.10.31 수정: 2014.11.12 1. 내년 말 가계대출 대란 올까 경제력이 취약한 가계의 빚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한국은행이 30일 내놓은 ‘금융안정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 어떤 내용인가요...

  • HERI
  • 2014.11.12
  • 조회수 4839

[착한경제] 유럽의 아름다운 타협 - HERI 경제뉴스해설(10/28)

등록: 2011.10.28 수정: 2014.11.12 1. 유럽에서 온 좋은 소식 27일 새벽 4시(현지 시각, 한국 시각 27일 오전 11시) 벨기에 브뤼셀의 EU 정상회의 회견장에 기자들이 호출됐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유로화 사용 ...

  • HERI
  • 2014.11.12
  • 조회수 4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