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3.06.04 수정: 2014.11.12
미국에서도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면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 기업인들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대통령의 개혁을 저지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체제를 만들려 했다. 이 음모가 성공했으면 역사의 물줄기는 지금과 전혀 다르게 흘렀으리라.
1933년 봄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이 몰고온 위기 극복을 위해 뉴딜정책을 입안한다. 공공지출 확대로 알려진 뉴딜정책은 사실 전례없이 강력한 법과 규제기관을 도입해 대기업과 은행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 대체해야 대공황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많은 기업인들은 뉴딜이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정책이라는데 공감했으나 일부는 분노했다. 이들은 “백악관이 선동하는 계급적 증오‘(루스벨트의 전임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가 뉴딜정책을 비난한 표현)에 비하면 파시즘이 매력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업인들의 모임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던 전쟁영웅 스메들리 달링턴 버틀러(Smedley Darlington Butler) 전 해군 장군에게 은밀히 접근해 “군대를 지휘해 백악관을 점령하고 미국의 독재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 기업인 중 한명인 로버트 클라크는 부유한 은행가였다. 그는 루스벨트 행정부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3천만 달러 재산 가운데 절반을 사용할 뜻이 있다고 버틀러에게 밝히기도 한다.
하지만 <백악관 장악음모 The Plot to Seize the White House>를 쓴 쥘 아처는 기업인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사람을 잘못봤다”고 말한다. 이 음모 뒤에 있는 기업인이야말로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이었다. 버틀러 장군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며 부조리한 미국 기업들에 대한 반감이 커녔다. 그는 전쟁이 미국 기업들이 만든 사건이며, 그가 지휘한 병사들은 고귀한 이상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고 믿었다. 버틀러는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한 뒤 1934년 11월 뉴욕에서 열린 반국가활동위원회 비밀회의에서 이 음모를 폭로했다. (조엘 바칸 『기업의 경제학』 황금사자 참고)
80년 전 기업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을 파시스트 국가로 만드는 데 실패했을지 모르나 21세기의 금융회사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리를 해 가는 듯하다. 미국 월가에서도 영국 시티에서도 이제는 웃음소리가 새 나온다. 2008년 리만브라더스 사태 이후 세계를 미증유의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으로 몰리며 규제의 칼날 위에 섰던 금융 회사들은 이제 어깨가 펴졌다. 집요한 로비로 규제의 발톱을 거의 뽑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경찰이 보호하는 월가의 상징 황소상 (한겨레 자료사진)
월가와 유럽의 대형금융회사를 구제하는 데 천문학적인 재정에 투입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부와 정치권은 금융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4년 반이 지난 2013년 현재 이런 조처들은 금융회사들의 반발로 상당부분 무력화됐다. 미국에서는 2010년 7월 마련된 대표적인 금융개혁법인 도드-프랭크법이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2년 유예된 상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낸 폴 볼커의 이름을 따서 ‘볼커 룰’로 불린 이 법은 미국 내 은행과 은행계열사 자기 계정의 증권, 파생상품 거래를 규제하고 헤지펀드 및 사모펀드와 특수관계를 맺거나 투자하는 행위를 막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7월 이 법안에 서명하며,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융개혁법이 될 것”이라고 기세를 올렸지만 현재는 핵심 내용이 대거 빠졌다.
도드-프랭크법 뿐 아니라 금융감독당국의 파생상품 거래 규제도 로비에 밀려 ‘솜방망이’가 됐다. 세계 최대 보험업체 에이아이지(AIG)를 파산 위기로 내몰아 182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도록 한 것이 규제받지 않은 파생상품 거래였다. 2008년 금융위기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된 파생상품을 규제하기위해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투자회사들이 파생상품을 계약할 때 ‘최소 5개 은행’과 협상하도록 했으나 이를 최근 ‘2개 은행’으로 완화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은 처음에 은행 간 경쟁을 촉진하려고 ‘공개입찰’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가 월가의 반발에 부딪혀 ‘최소 5개 은행’으로 축소했었다. 원래 취지는 700조달러에 이르는 파생상품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제이피모건과 시티그룹 등 대형은행들을 상호 경쟁시켜 이들의 가격 담합에 따른 시장 왜곡을 막자는 것이었다. 즉 5개 은행과 협상하도록 한 것도 당초 안에서 후퇴했던 것인데 여기서 한발 더 뒤로 물러난 것이다. ‘금융개혁을 위한 미국인들’의 대표 마커스 스탠리는 지난달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조처로 파생상품 시장은 금융위기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고 개탄했다.
유럽에서도 전선은 무너져 내렸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루투갈 등 11개 국가가 합의한 유럽연합 차원의 금융거래세 부과계획이 당초 계획과 달리 크게 축소될 전망이라고 <로이터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당초 2014년 부터 주식, 채권 파상생품 거래에 대해 거래금액의 0.1%를 부과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주식에 대해서만 부과하고 세율도 당초 안의 10분의 1인 0.01%만 부과하는 쪽으로 논의가 흘러가고 있다. 금융거래세 협상과정에 정통한 한 관료는 “모든 것이 상당히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초 한 해 350억 유로(450억 달러)로 기대되던 금융거래세 징수가 기대됐으나 35억 유로로 축소될 전망이다.
<로이터통신>은 금융거래세에 대한 이런 전면적인(sweeping) 개정이 “그들이 일으킨 위기의 댓가를 치르도록 설계된 당초 계획에 반대해 맹렬하게(furiously) 로비한 은행과 중개회사의 승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월가의 공격도 매서웠다. 전직 의원, 중앙은행 간부, 재무부 관료 등을 로비스트로 동원해 공화당과 민주당 내 친 월가 성향의 의원들을 움직였다. 미국 ‘책임정치센터’(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에 따르면 지난해 월가 금융사들이 이런데 쓴 전체 로비 규모는 6천만 달러 였다. 예를 들어 JP모간은 지난해 750만 달러 이상을 로비에 썼다. 웰스파고나 씨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같은 회사도 이에 못지않은 자금을 들여 주요 의원들의 후원회에 기부하는 등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파생상품 관련 규제 완화를 위해서도 월가는 최근 3년 동안 금융당국 관계자들과 80차례 이상 만나 전방위적인 로비를 벌여 결국 규제 수준을 더욱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 가운데 5월 초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를 통과하는 H.R. 992 법안이 파생상품을 규제하는 도드-프랭크 법을 사실상 무력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법안에 찬성을 한 의원들은 시티그룹, 골드만삭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대형은행 그룹들로부터 반대한 의원에 비해 2.6배 많은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다 보니 미국의 금융정책을 “월가가(정확히는 그들이 고용한 로비스트들이) 작성한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뉴욕타임즈>가 이메일을 입수해 분석한 것을 보면 5월 초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를 통과한 한 법안은 “시티은행 작품”이 명백했다. 전체 85개의 법조문 가운데 70개가 시티그룹의 제안을 담고 있다. 특히 2개의 핵심적인 조문은 글자까지 시티그룹의 제안을 그대로 옮겼는데 단지 바꾼 2개의 단어는 단수를 복수로 만든 것뿐이었다.
2011년 뉴욕 리버티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월가를 점거하라' 시위 (한겨레 자료사진)
월가가 늘 당근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슬쩍슬쩍 ‘발톱’을 내보이기도 한다. 대형 로펌을 동원해 금융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금융개혁의 발목을 잡는데 효과적이다. 대표적인 예는 상공회의소가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상대로 “새 규정을 도입할 때 비용-편익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낸 것이다. 이런 소송은 “월가를 규제하려면 소송도 감내해야 한다”는 인식을 퍼뜨려 금융당국의개혁 의지를 약화시킨다. 이런 소송에서 월가를 대변하는 로펌은 금융당국자들보다 실력이 월등할 때가 많다. 또 규제당국자들도 나중에 퇴임하고 이런 곳에서 일할지 모르고, 이미 그런 자리에 간 선후배들이 “설명할 게 있다”며 만나자는 요청이 줄을 서 있기도 하다. 월가에 우호적인 의원들을 동원해 금융당국의 예산을 깎기도 한다.
세계경제는 1920년대 대공황 이래 최악이라는 경제위기의 수렁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아시아, 남미 등의 여러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집을 잃었으며, 수입이 줄어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대재앙’을 몰고 월가의 탐욕을 제어하고 ‘대마불사’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규제해야 한다는 합의는 어느 때 보다 강했다. 2011년 말 미국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는 99%의 보통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뭔가 제대로 이뤄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정책 결정이 돈, 인맥, 지식 등의 자원이 월등한 기업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커뮤니케이션학 박사)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