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2.11.07 수정: 2014.11.12


샘물은 위에서 살살 걷어서 먹어야 한다. 휘저어 놓으면 그나마 아무도 못먹는다. 무엇이든 어설프게 하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정치권에서 앞다투어 약속하는 비정규직 보호 또는 철폐 약속도 마찬가지다.


11월6일 고용주들을 대표하는 경총이 내놓은 통계와 주장은 그래서 일단 경청할 만 하다. 비정규직은 일단 경총 집계로 591만명이다. 전체 근로자수 1490만명의 40%나 되는 많은 숫자다. 이 비정규직 가운데 70.4%가 종업원 30명 미만 영세기업에서 고용자들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고용을 규제하거나 이들에게 4대 보험 등을 들어주도록 강제하면 이들 영세 업주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기업 사정이 더 심각해지고, 결국은 고용을 기피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란 예상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가 있는 게 낫지 실업자로 지내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보호가 정작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규제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식의 논리가 가진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꽤나 생각해 주는 듯 하지만, 이런 말에는 애정이 없고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알버트 허쉬만이 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 가>(웅진 지식하우스 2010)를 보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 단골로 쓰는 논리로  '역효과 명제'라는 것이 나온다. 도와주려고 하는 행동이 오히려 약자를 더 괴롭게 할 뿐이라는 것인데, 제법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와 추론을 동원해서 "결국 문제만 악화시켰다"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다. 몇년 전 비정규직 2년 제한법을 두고 비정규직의 실직만 재촉할 것이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기업 정규직의 기득권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가 악회된다는 주장도 그렇다. 대기업 정규직이 노조에 기대 '집단 이기주의'로 보일 만큼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이런 것은 우리나라의 사회안전망과 복지가 형편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잔업과 특근을 하지 않으면 높은 주거비와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에서 근로시간을 늘이더라도 새로 사람을 충원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또 한번 정규직에서 떨려나면 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 노조를 방패막이로 똘똘 뭉쳐있어야 하지 않았겠는지?


지금 필요한 것은 자칫하면 그 나마 있는 밥그릇이라도 깰 지 모르니 가만히 있자는 것이 아니라 잘 해결해 보자는 마음가짐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숙제가 됐다. 경영자들도 어려운 처지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권이 제도를 설계할 때 먼저할 것과 나중에 할 것, 효과와 역효과를 제대로 계산해서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반대자를 적으로 돌리지 않게 외적동기(인센티브, 벌칙)와 함께 내적동기(자신의 직원들에게 책임을 지려는 경영자의 순수성 등)를 적절히 부여해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더 나빠질까자봐 "꿩처럼 머리를 땅속에 박는 게 아니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이봉현  경제평론가,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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