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등록: 2011.12.20 수정: 2014.11.12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국제 공조의 틀인 ‘쿄토의정서’가 휴지가 될 운명에 놓였다고 한다. 12월 중순 남아공화국 더반 총회 직후 캐나다가 탈퇴를 선언했고, 일본과 러시아도 심상치 않다. 온실가스 배출 규모로 지난해 세계 1~3위 국가인 중국, 미국, 인도가 이미 빠진 상태에서 4위(러시아), 5위(일본), 8위(캐나다) 국가 마저 이탈할 때 협약은 유명무실해진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은 더 이상 과학자들의 논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잦아지는 폭우와 가뭄, 해수면 상승, 북극권 빙하의 급속한 감소 등을 겪으며 대응이 시급하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의 주요인으로 지목된 온실가스(이산화탄소) 감축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이렇게 지지부진하다.


교토의정서가 ‘빈껍데기’가 될 위기에 놓이자 국내에서도 그간 정부가 제시한 탄소 배출 감축 계획을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은 2015년 1월부터 시행키로 한 배출권 거래제도 도입을 늦추거나 아예 취소하자고 주장한다. 다른 나라는 빠지는 데 한국만 앞서나갈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세계가 ‘돌격 앞으로!’를 외쳤는데 순진한 한국만 뛰쳐나가고 다른 모든 나라는 뒤로 숨어버린” 것이라 한다(한국경제 12월13일).


각 나라가 제 갈 길로 가려는 지금, 인류는 파멸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갈림길을 지나치는 지도 모른다. 이 절박한 문제 앞에서 세계는  ‘윈-윈 게임’이 아니고  이기적 ‘제로섬 게임’으로 자꾸 빠져들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지구 온난화의 과학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의 활동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는 학자에 비해 수는 미미하지만 영향은 작다고 할 수 없다. 지구 온난화와 관련된 여러 과학적 발견과 주장, 그리고 정책 처방을 ‘합의의 영역’에서  ‘논쟁의 영역’으로 계속 끌고 들어 가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들도 지구 기온이 상승하고 기상이변이 잦아지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수긍한다. 하지만 이산화탄소를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스티브 밀로이 정크사이언스 발행인은 “자연재해와 지형변화 및 인구급증 등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는 역사적 현실일 뿐”이라며 “이런 현상을 인위적인 탄산가스 배출과 과학적으로 연관 지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세계일보 2011년 6월14일). 회의론자들은 북극곰 멸종이나 해수면 상승 같은 허황된 추측에 속아서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편다.


기후변화 담론이 이미 공업화를 달성한 선진국이 후발 개도국에 제한을 가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음모론도 나온다. 일부 우익 인사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생태주의의 가면을 쓰고 벌이는 자본주의 전복운동이라 보기도 한다. 노르웨이에서 지난해 8월 총기를 난사해 91명의 희생자를 낸 안데르스 브레이비크가 홈페이지에 올린 선언문에는 “환경 공산주의를 멈추라”는 말이 있어, 그가 기후변화 회의론자였음이 드러나기도 했다(내일신문 2011년 8월3일).


기후변화를 둘러싼 담론 싸움은 연구소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지난 10여 년 간 영국의 국제정책네트워크(IPN), 경제문제연구소(IEA) 와 미국의 조지 마샬 연구소, 케이토연구소 등은 보고서와 포럼을 통해 지구 온난화란 과학이 아닌 정치적 의견일 뿐이라고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정책 자료로도 활용돼, 온실가스 감축노력에 저항하는 나라와 세력에 반대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이 쿄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고 버티면서 내세운 것도 기후변화가 과학적으로 논란중인 사안이란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는 주장의 객관성과 투명성이다. 기후변화 회의론에 서 있는 연구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연구가 기업의 지원으로 이뤄져, 이들 기업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회원으로 있는 왕립자연과학협회(Royal Society)는 2006년 미국의 석유회사 엑손모빌에 이례적으로 서한을 보내 “증거를 부정하며 기후변화를 오도하는” 연구소나 단체에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협회는 엑손이 2005년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39개 단체에 290만 달러를 지원했다며, 그 수혜대상으로 국제정책네트워크, 조지 마셜연구소 등을 지목했다.


실재 국제정책네트워크는 엑손으로부터 2003년 ‘기후변화 홍보’ 등을 명목으로 5만달러, 2004년 11만5천 달러, 2005년 13만 달러를 받았다. 이후 나온 <기후변화의 영향: 미래를 위한 평가>란 보고서는 기후변화 주장은 ‘잘못된 과학, 잘못된 논리, 잘못된 경제학’을 채택한 ‘지명적인 오류’라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유럽기업감시’(CE O)란 단체가 기후변화에 부정적인 유럽 내 8개 연구소를 조사해 2010년 12월 낸 자료를 보면, 석유회사 비피(BP)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다고 인정한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를 제외하고 다른 곳들은 모두 자금조달을 어떻게 하는 지 밝히지 않았다.


석유회사 엑손모빌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연구소나 단체에 자금지원을 하는 기업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비피나 셀 등 다른 석유회사보다 대체 에너지 투자에 뒤처졌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석유, 가스, 목재, 화학물질 등을 취급하는 코치 인더스트리라는 미국의 개인회사가 엑손모빌 보다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찰스 코치와 데이비드 코치 형제가 운영하는 자산 430억 달러규모의 이 회사는 미국 우익 포퓰리즘 운동인 피타티를 지원하고, 부자감세와 규제완화 로비에 뭉치돈을 쓰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그린피스가 2010년 3월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엑슨은 890만 달러를 기후변화 회의론자에게 지원했지만 코치 인더스트리가 지원한 규모는 그 3배인 2490만 달러에 이른다.


기업이 연구소나 사회운동에 돈을 대는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일 수 있지만, 대개는 기업의 목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특히 큰 이해가 걸린 사안은 규제 정책과 관련된 지(知)적인 환경 전체를 장악해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홍보 또는 정보조작(스핀)의 하나이다. 제 삼자를 내세우는 이런 홍보기법으로 기업은 불리한 지식을 반박하거나, 결정을 늦추거나, 아니면 사안이 아예 정책 의제로 떠오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최근 기업이 정치적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 것은 은밀하게 진행되는 전략 홍보나 스핀이 힘을 발휘한 때문이기도 하다.


‘책상물림’의 비극은 항상 진실이  ‘뉴턴의 사과’처럼 뚝 떨어질 것으로 믿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과학적 지식 마저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지식이 사회성을 지닌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 지식이 추구되고, 해석되고, 채택 또는 폐기된다는 걸 뜻한다.  신 중심의 중세 세계관을 뒤엎고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회 권력에 큰 타격을 준 ‘지동설’도 380여년이 지나서야 공식 사면복권된다.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과학적 담론들은 지식의 사회성을 잘 보여주는 최근의 사례이다. 국제정치적 알력과 경제적 이해관계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주장하는 과학자를 또 하나의 갈릴레오로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래도 지구는 더워지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낮은 중얼거림을 견딜수 있다면....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bhlee@hani.co.kr

블로그 http://blog.naver.com/reuterb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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