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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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가 흥미롭다. 지난 5월 총선에서 허망하게 패배한 뒤 불과 3개월만에 이 정도의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하다. 대통령 선거에서 지고 2년 반이 흘렀지만 여전히 패배와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나라의 야당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활력을 되찾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단연 제러미 코빈이다. ‘과격분자’인 그가 어디서 갑자기 ‘굴러온 돌’이 아니라 노동당이 오랫동안 보유해 온 ‘노동당의 자원’이라는 점도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동안 ‘코빈 때리기’에 열을 올렸던 <가디언>도 이젠 좀 더 균형 잡힌 모습이다.

코빈의 인기 비결은 그가 굉장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과격한 사회주의 원칙론자인 줄 알았던 그가 알고보니 지극히 당연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가 그에게 장기적으로 약일지 독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세계경제위기를 일으킨 장본인인 금융계 임원들의 보수를 깎고, 노동당의 빼앗긴 지지자들을 되찾기 위해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 수를 늘리겠다는 것은 결코 상식에서 벗어난 얘기가 아니다.

그가 내놓는 경제정책도 그렇다. 코빈이 자신의 경제정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한마디로 국가의 역할 강화다. 이는 현재 보수당 정부의 ‘긴축’ 일변도 정책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지난 달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은 새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이번 회계연도에 310억 파운드(약 60조원)의 공공자산을 매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4년간 최저임금을 현재의 6.5파운드에서 9파운드까지 올리겠다는 ‘놀라운’ 계획도 발표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는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보조를 줄이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이를테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근로계약 유연화는 적극 장려될 터다.

코빈의 ‘상식적인’ 경제정책 중 하나가 사회적 투자를 국가 주도로 적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확충해 나가기 위해 국가투자은행을 세우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이래 당연시되어 온 자본주의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재서술한 것뿐이다. 더구나 어차피 세계경제의 불황이 장기화되고 민간투자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투자자로서의 역할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재원마련은? 첫째로 코빈은 그간 기업에게 안겨주었던 각종 세금감면이나 보조금의 삭감을 제안한다. 어차피 투자촉진을 위한 ‘당근’이었으니 거둬들이는 게 맞다. 이는 세제의 단순화·합리화라는 미덕까지 덤으로 발휘할 것이다. 기업부문의 남아도는 자금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 정부의 경우에도, 그동안 이 잉여자금을 생산적 투자로 돌리기 위해 무던 애를 썼지만 세계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별 효과를 못 봤는데,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국가 주도의 공공투자계획에 이런 민간자금을 대규모로 끌어들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이와 같이 ‘상식적인’ 입장을 견지한 결과 코빈은 최근 명망높은 경제학자들의 집단 지지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그를 과격하게 보고 불편해할 사람도 많겠다. 그런 의미에서 코빈이 당선한다면, 이 자본주의 세계의 상식의 지평을 넓혀줄 거라는 장점도 있다. 경제학자로서 그를 응원한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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