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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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어려서부터 하도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한 말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것이다. ‘은근과 끈기’로 온갖 외세의 공격에 맞섰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나서서 의병이 되거나 국채보상운동을 벌였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도 경제성장도 ‘유태인’만큼 머리 좋은 한국인이었기에 가능했다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이런 ‘교육’이 있었기에, 한국인은 젓가락질 덕분에 현미경 밑을 다루는 데 유리하다는 ‘소설’도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였던 게 우리다.

세상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바뀐 것일까? 언제부턴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아온 위와 같은 교육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논리가 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특히 1997년 이후 한국경제가 겪어온 단계적인 경제성장률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노동생산성’의 저하가 꼽히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우리나라는 노동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으로써 이를 벌충해야만 한다는 ‘그럴싸한’ 분석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로 모자라 초중등학생까지 사실상의 취업교육에 내몰리고 있다. 지난 15년간 맹렬하게 진행된 노동의 비정규직화도 개별기업과 전체사회 두 차원에서의 노동생산성 제고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현 정부는 이른바 ‘노동개혁’을 통해 기업이 ‘저성과자’를 솎아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의지를 불사르고 있는데, 이 또한 이상과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과는? 여전히 우리 경제는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있고, 올해는 2%대 성장도 벅차다는 예측까지 나온다. 무엇이 문제일까? 정말 한국인들은 노동생산성이 낮은 ‘저성과자’인가? 우리의 상식과 일상의 경험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 한국인의 교육은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이고, 세상 어딜 나가봐도 한국인들은 ‘미쳤다’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실제로 한국생산성본부에서 내는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이후 한국의 노동생산성 향상속도는 주요 선진국들 사이에서 최고 수준이다. 다만 최근 들어 그 속도가 둔화되고 있긴 하다.

요컨대 개인으로서 한국인들은 여전히 우수한 편이고, 지난 15년 간의 노동생산성 향상 드라이브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경제성장이 미미하다면, 대중을 더 쥐어짜 생산성을 높인다는 기존의 방식 자체를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대학교육을 포함한 각종 기술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력은 넘쳐나는 반면,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고, 최저임금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 보장도 어려운 수준에 묶여 있으며, 그나마 매년 2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최저임금도 못 받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높은 이윤을 못 내고 나라경제의 성장에 적절한 기여를 못하는 것은 누구인가? 정부에 대한 로비와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해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사회의 진짜 ‘저성과자’는 누구인가? .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등록: 2015-09-21 20:24수정: 2015-09-22 10:04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finance/709828.html


[김공회의 경제산책 더보기]

영국 노동당 코빈의 상식적인 경제정책

우리의 ‘거울’이기도 한 그리스

‘비전’ 가득한 경제전망과 추경의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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