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한귀영 사회조사센터장.JPG

얼마 전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남자 국가대표팀이 우승을 했다. 대표선수 중 상당수가 축구팬에게도 낯선 신인들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수시로 K리그 경기를 직접 관전하고,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를 선발했다고 한다. 원칙을 무너뜨렸다고 자인하면서까지 자신의 ‘아이들’을 선발했다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 전임 감독과 비교가 된다.

김연아와 박지성의 공이 크다고 해서 그들의 딸, 아들은 경쟁 없이 자동으로 국가대표로 뽑자고 한다면 어떨까? 아마 두 사람이 앞장서서 반대하리라. 세계에 나가서 경쟁할 국가대표를 혈연, 지연, 인맥 따위로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재벌 기업들은 자식이 잇는 게 당연시된다. 고작 지분 몇 %로 거대 기업을 사유재산이라 우기며 세습을 정당화한다. 스포츠보다 훨씬 치열한 기업 경쟁의 세계에서 말이다.

재벌들만 그런 건 아니다. 대형 교회의 목사직 세습도 관행이 되어가고 있고, 심지어 일부 대기업 노조들조차 장기근속자 자녀의 특례취업을 단협에 넣고 있다. 이 와중에 여야의 국회의원 두 명의 자녀가 취업에 특혜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은 말로는 경쟁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경쟁을 경멸하고 억압한다. 이 암울한 현실 앞에서 기성세대는 혀나 끌끌 차고 말지 몰라도, 당사자인 청년세대는 절망에 빠져들고 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에 따르면, 청년들이 바라본 한국 사회 공정성은 100점 만점에 20.6점으로 바닥 수준이었다. 청년들의 86.1%는 우리 사회가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되지 않는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72.7%는 사회적 성취에서 나의 노력보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청년이라고 인식이 같지는 않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공정성에 대한 인식도 차이가 난다. 중상층 이상에서는 공정성 지수가 26.4점이었는데, 하위 계층으로 가면서 떨어져 빈곤층에서는 18.6점에 그쳤다. 부모로부터 기댈 것이 없는 가난한 청년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야봐야 별 볼 일 없으리라는 걸 직감으로 안다.

이번 조사에서는 청년들이 일자리, 네트워크 등과 같은 삶의 기회는 물론, 결혼, 출산 등 인생의 통과의례, 나아가 자존감마저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크게 차이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신의 노력과 관계없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미래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다이내믹 코리아’로 상징되는 정치사회적 역동성은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 역동성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에 의해 가능했다. 하지만 부모의 자산에 따라 청년들의 삶이 결정되면 이 능력주의 원리는 붕괴한다.

천년제국 로마는 자영농이 시민이자 병사로서 떠받쳤다. 피정복민에게도 로마시민권이 부여됐다. 로마의 지배층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들이 들어찼다. 로마가 천년을 간 원동력이었고, 이 시스템이 무너지자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선 건국의 주도자들 또한 귀족의 과두제를 혁파하고 농지를 분배하고, 평민에게 과거급제의 길을 열었다. 조선이 오백년을 간 힘이었다. 세도정치가 횡행하자 망국을 피할 수 없었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우파가 찬양하는 기업가 정신의 주창자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상류사회를 호텔 로비에 비유했다. 호텔 로비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머무는 곳이 아니다. 거기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로비에 살림을 차리고 문을 닫아버리면 그 호텔은 망한다. 한국의 기득권들이 딱 이 모양새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등록: 2015-08-23 18:41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5596.html?_fr=m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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