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한겨레 프리즘] 진보정치의 열린 틈새

admin 2015. 07. 20
조회수 5543

한귀영 사회조사센터장.JPG

2004년 총선에서 신생 민주노동당은 정당득표율 13.1%를 얻어 단번에 10석을 획득했다. 선거 직후 시골 폐교를 약간 손본 남원연수원에서 국회의원과 평당원이 어울려 밤새 토론하고 의원도 자기 식기는 손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기성 정치의 문법을 깨는 신선한 모습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한때 당 지지도가 20%를 넘었다. 당시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과 정책진용은 정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 보수언론마저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민노당 정책실에는 폐쇄적이지 않고 ‘진보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독종들이 많았다. 이들이 만든 정책이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복지 확대를 위한 조세개혁,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같은 것들이었다. 대형마트 규제는 8년 뒤에 빛을 봤고, 조세개혁과 복지는 지금 정치권의 가장 큰 쟁점이다.”

이 모든 것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덕에 가능했다. 동시에 이 제도의 결함도 적나라했다. 진보정당은 당세에 비해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기대를 모은 의원들을 여럿 배출했다. 비례대표 1회 원칙에 따라 지역구로 출마한 의원들은 명성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거대 기성정당의 조직과 물량전 앞에서 진보정당의 힘은 가냘팠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8할이 선거제도 개혁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제도 탓에 진보정당은 만년 미니정당이었다.

그 시절 이후 십여년 만에 선거제도 개혁의 기회가 열렸다. 내년 총선 전까지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조정해야 한다는 작년 10월 헌법재판소 결정이 발단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정치학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의견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적정한 의원 정수를 ‘최소 330명’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전체의 70.2%였고, 현재의 국회의원 정원을 유지할 경우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77.5%에 이르렀다. 또 하나 주목할 의견도 있었다. 지구당을 부활하고 정당 설립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정당에 대해 누구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해왔던 이들의 의견이기에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이들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이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는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높은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정의당 신규 당원이 약 400명에 이른다. 정치의 힘, 가능성을 복구했다는 데서 이번 선거의 의미를 찾고 싶다.

그 가운데 조성주라는 정치 신인이 있다. 그는 당대표 출마의 변에서 2세대 진보정치는 노동운동 밖의 노동자들, 광장 밖의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정치는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고 위로여야 한다”며 “어떻게 정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말로 낙선인사를 마무리했다. 어느 쪽이든 울림이 깊었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시민의 기본 덕목처럼 여기는 세상에, 정치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열망을 신선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모처럼 진보 정치에 가능성의 틈새가 열렸다. 이 틈새가 의미있는 현실로 확장되려면 선거제도 개혁이 필수다. 이상적인 원론들은 일단 제쳐두자면 비례대표 의원 수 확대가 핵심이다. 여야 거대정당은 기득권 유지에 집중할 것이고, 일부 언론은 언제나처럼 개혁을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이 상수들을 변수로 만들어온 것은 결국 대중의 관심과 지지였다. 진보 정치가 그 일을 해내야 한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등록 :2015-07-19 18:46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0851.html
첨부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싱크탱크 시각] 그러므로 ‘사람 중심’ 경제다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성장론이 유행이다. 새누리당은 ‘일자리 중심’ 성장론, 더불어민주당은 ‘더불어’ 성장론, 국민의당은 ‘공정’ 성장론을 내세우고 있다. 경제성장론의 백...

  • admin
  • 2016.02.29
  • 조회수 6139

[유레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 박순빈

날아다니는 국수를 창조신으로 떠받드는 종교가 있다. 일명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SM: Flying Spaghetti Monster)교’다. 미국 오리건주립대학의 보비 헨더슨이라는 한 물리학도가 2005년 창시했다. 그에 따르면, 날아다...

  • admin
  • 2016.02.18
  • 조회수 6368

[한겨레 프리즘] 안보이슈의 총선 효과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한반도 평화경제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출범 12년 만에 전격 폐쇄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총선이 다가왔음...

  • admin
  • 2016.02.15
  • 조회수 5488

[싱크탱크 시각] 기억 속 가라앉은 세월호의 시그널 / 조현경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지난 1월 시작된 티브이엔(tvN) 드라마 <시그널>의 흥행몰이가 한창이다. 나 역시 요즘 <시그널>에 빠져 산다. <시그널>은 현재의 경찰청 ‘장기미제전담팀’의 프로파일러 박해영 경...

  • admin
  • 2016.02.15
  • 조회수 6064

[싱크탱크시각] ‘해고 자유화’에 내몰린 국민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결국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지난 22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개혁을 위한 공정인사·취업규칙 지침’을 발표했다. 한국노총이 노사정 합의에 대한 파기선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

  • admin
  • 2016.01.25
  • 조회수 6466

[유레카] ‘뱀의 입’ 속으로 / 박순빈

박순빈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금융위원회가 18일 정부합동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온라인 ‘로보어드바이저’ 전문업 도입 방침을 밝혔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일환이란다. 누구를 위한 창...

  • admin
  • 2016.01.20
  • 조회수 6819

[싱크탱크 시각] 임금피크제의 불편한 진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2015년 11월 종영된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송곳>의 대사 중 도드라졌던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취업규칙’이다. 취업규칙이란 ‘직원들의 노동조건에 관한 회사의 규정’을 말한...

  • admin
  • 2016.01.18
  • 조회수 6465

[한겨레 프리즘] 제3지대 신당의 가능성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2016년 새해 정가의 키워드는 단연 안철수다. 지난 주말 발표된 갤럽 조사 결과를 보면, 안철수 신당의 지지도는 21%로 새누리당(35%)에 이어 2위로 올라섰고, 더불어민주당은 19%로...

  • admin
  • 2016.01.11
  • 조회수 6246

[싱크탱크시각] 쌍용차 복직과 통상해고 지침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박근혜 정부가 새로운 해고 방식으로 ‘통상해고’ 도입을 공식화하던 바로 그날, 해고의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우리 사회에 각인시켰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6년 만...

  • admin
  • 2016.01.04
  • 조회수 6000

[김공회의 경제산책] 경제본질 보려면 ‘중산층’보다 ‘중간계급’ 개념을

김공회 연구위원 ‘중산층을 70%로 늘리겠다.’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다. 이 때문인지, 중산층 논의가 이번 정권 들어 특히 많다. 중산층이란 누구인가? 흔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중산층을 중위소득...

  • admin
  • 2015.12.21
  • 조회수 6193

[싱크탱크시각] 독일 국민이 부러운 이유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12월9일 미국 <타임>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르켈 총리의 얼굴을 전면에 내건 표지의 제목은 ‘자유세계의 총...

  • admin
  • 2015.12.14
  • 조회수 6075

[한겨레 프리즘] 이 시대 구원은 어디에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파시즘의 군홧발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다. 국가는 우리 머릿속을 국정 사상으로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은 복면을 쓰고 ...

  • admin
  • 2015.12.14
  • 조회수 5951

[싱크탱크 시각] 착한 소비에서 정의로운 소비로 / 조현경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어린 이방원(남다름)이 홍인방(전노민)에게 던...

  • admin
  • 2015.12.07
  • 조회수 6435

[싱크탱크 시각] ‘응팔’…골목이여 응답하라 / 조현경

88서울올림픽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서울 광진구(옛 성동구) 자양동 59번 버스 종점 옆 상가 1층 ‘물망초양품점’에 딸린 작은 가겟방이었다. 그 시절 나의 골목은 버스기사 아저씨들의 담배 냄새와 ...

  • admin
  • 2015.12.07
  • 조회수 7002

[유레카] 부채의 원죄 / 박순빈

빚을 갚아야 할 의무는, 냉정한 경제이론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빚은 반드시 갚는다는 게 법칙일 경우 금융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은행이 원금과 이자를 늘 돌려받는다는 전제로 대출 영업을 한다면 어떤 일...

  • admin
  • 2015.12.02
  • 조회수 5571

[싱크탱크 시각] ‘청년수당’이 두려운 박근혜 정부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경기 성남시의 ‘청년배당’에 이어 서울특별시의 ‘청년활동지원(청년수당) 사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한쪽에서는 취업 기회조차 갖지 못한 청년들을 위한 획기적인 ‘이행 노동시장 정...

  • admin
  • 2015.11.23
  • 조회수 6723

[김공회의 경제산책] 정부 눈에는 실업자도 취업자로…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지난주 기획재정부는 10월 고용동향을 발표하면서 전체 실업률이 전년도에 비해 0.1%포인트 준 3.1%를 기록했고, 청년층(15~29살) 실업률도 같은 기간 8.0%에서 7.4%로 크게 줄었다는 ‘희...

  • admin
  • 2015.11.17
  • 조회수 6007

[한겨레 프리즘] ‘헬조선’의 분노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지난 토요일,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 이후 7년 만에 가장 많은 숫자다. 이날 정권은 위헌 결정 따위는 무시하고 다시 차벽...

  • admin
  • 2015.11.17
  • 조회수 5797

[유레카] 세계화의 역설 / 박순빈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 자객 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됐다. 흔히 이 사건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극적 묘사일 뿐 엄밀한 역사적 기록이라...

  • admin
  • 2015.11.11
  • 조회수 5767

[현장에서] 디턴 논란, 저주와 반성 사이에서

디턴의 원저(왼쪽)와 한경BP의 번역본 현장에서 <한겨레>는 10월30일치 토요판 커버스토리에서 <한국경제>의 자회사 한경비피(BP)가 앵거스 디턴의 〈The Great Escape〉를 왜곡 번역했으며,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과 현진권 자유경...

  • admin
  • 2015.11.03
  • 조회수 6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