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금융 대통령’ 이복현 [아침햇발]

HERI 2023. 02. 17
조회수 415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이복현 금감원장.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이복현 금감원장. 연합뉴스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이원조 전 국회의원은 5·6공 시대 ‘금융계 황제’로 군림한, 관치금융의 상징이었다. 친구인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등에 업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자문위원, 청와대 경제비서관, 은행감독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때 “이원조 없이는 은행장이 될 수 없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최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행보를 보면 윤석열 정부의 ‘금융 대통령’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연임 의지를 굽히지 않던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결국 주저앉혔다. 차기 회장에 모피아(금융관료) 출신인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 선임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관치 논란이 거센데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금감원장이 이번처럼 은행 인사에 노골적으로 관여한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금융권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을 개입 명분으로 내세운다. 은행 지배구조의 후진성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최고경영자가 정치권의 입김으로 선임되는 ‘낙하산 임명’, 우호 세력으로 이사회를 구성해 임기를 연장하는 ‘셀프 연임’, 내부 견제가 없다 보니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독단 경영’이 단적인 예이다.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나름 경영 성과도 냈지만, 디엘에프(DLF)·라임 사모펀드 사태, 600억원대 직원 횡령 등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두차례나 중징계를 받았다. 파벌 인사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손 회장은 책임질 생각은 않고, 무리하게 3연임을 추진했다. 우리금융 안에서조차 “손 회장의 과욕이 모피아가 회장으로 밀고 들어오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이 많다.

사외이사들이 다수인 이사회도 경영진 견제·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을 못 했다. 손 회장의 과욕에 제동을 걸지 못하더니, 결국 관치의 들러리 역할로 전락했다. 여기에 은행 노조까지 경영진과 유착되어, 이른바 경영진-사외이사-노조 ‘3각 담합’ 구조가 형성됐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감독 당국이 이런 폐해를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승계 시스템과 실효성 있는 내부 통제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법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 국내 은행들도 승계 시스템이 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또 내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경영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기관투자자가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가 핵심이다.

그러나 후진적인 은행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이 이복현 금감원장의 ‘신관치’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관치는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족쇄가 되었다. 외환위기는 관치가 사망선고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검찰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산하 공기업 기관장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했다. 이전 정부가 은밀히 공기업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위법이고, 현 정부가 명확한 법적 근거도 없이 공개리에 민간기업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합법이라면 납득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윤석열 정부의 은행권에 대한 공세는 단순히 지배구조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윤 대통령과 이 금감원장은 연일 핑퐁게임을 하듯 은행들을 매섭게 몰아붙인다. 금융의 공공성을 망각한 채 금리 인상에 편승해서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이자 장사로 천문학적 이익을 챙기고, 성과급·퇴직금으로 ‘돈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은행과 통신을 묶어서 과점 시장 구조에 칼을 들이댈 기세다.

고금리·고물가로 고통받는 다수의 국민은 윤 정부의 ‘은행 때리기’를 속 시원하다고 여길 수 있다. 이는 정권 차원에서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한 고도의 정치행위일 가능성이 있다. 정부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은행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 관심을 돌리고, 정부 책임도 회피하는 1석 2조의 카드가 될 수 있다. 눈앞의 정치적 유불리만 계산해 포퓰리즘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노조 때리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은행 때리기는 노조 때리기와 마찬가지로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문제의 근본은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적 갈등과 비용만 키울 수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국민의 가장 큰 근심은 한국 사회가 어렵사리 이룩한 역사적 성과들이 부정되면서, 과거로 퇴보하는 것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을 앞세운 윤 대통령의 신관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 같다.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800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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