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전기·가스요금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처럼 독립적, 전문적인 기구에서 결정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은 금통위에서 통화정책방향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고 있다. 한은 제공
전기·가스요금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처럼 독립적, 전문적인 기구에서 결정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은 금통위에서 통화정책방향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고 있다. 한은 제공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최근 금리가 가파르게 올라 부동산 대출을 받은 이들이 힘들다. 그래도 기준금리를 연이어 올리는 한국은행을 원망하는 일은 보지 못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물가와 국내외 경제 상황을 종합해 독립적이고 전문적으로 판단했으리라 믿기에 그럴 것이다. 금리가 오를 때 사람들은 절약해 대출부터 갚고, 집 사기를 미루는 등 최대한 적응해간다. 만일 어느 정치인이나 관료가 “투자가 위축되고 일자리가 줄어드니 금리 인상을 자제하라”고 간섭하면 어찌 될까?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던 시절에는 종종 있었지만, 1998년 한은법을 개정해 금통위의 독립성을 보장한 뒤로 그런 간섭은 금물이다. 금리를 정치적 고려를 앞세워 임의로 결정할 때, 경제에 여러 왜곡과 후유증을 낳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돈의 가격인 이자율을 정할 때는 자리잡은 독립성, 전문성의 원칙이 에너지 가격에서는 딴 나라 일이 된다. 전기나 가스 요금은 국민 경제에 금리 못지않게 영향을 주는데도 그렇다. 대신 에너지 가격은 정치적으로 결정됐다. 정부는 물가관리를 위해 공공요금을 눌렀고, 정치인들은 연례행사인 선거를 앞두고 욕먹을 일은 피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전기요금을 심의하는 민관합동 전기위원회가 있으나 ‘거수기’에 불과하고, 실재는 산업부 장관이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결정한다. 연료비에 전기요금을 연동시키는 제도를 2021년 초에 도입해놓고도 지키지 않는다.

전기의 원료인 천연가스와 원유 가격은 오르고 내렸으나 전기요금은 2013년 이후 사실상 동결됐다. 가스요금도 별다르지 않았다. 원료가 비쌀 때는 한전과 가스공사가 적자를 보고, 몇년이 지나 국제가격이 내려갈 때 나오는 이익으로 메웠다. 전기소매요금이 원가의 절반밖에 안 되자 김종갑 전 한전 사장은 “수입 콩값이 올라갈 때도 그만큼 두부값을 올리지 않았더니 이제는 두부값이 콩값보다 싸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천연가스 시장의 판이 바뀌자 이런 결정 방식은 파국을 맞았다. 그 결과가 지난해 한전의 30조원 적자, 가스공사의 9조원 미수금, 그리고 최근의 난방비 폭등이다. 최근 여야가 난방비를 두고 서로 ‘네 탓 공방’을 하고 있지만, 정치적 결정과 숙제 미루기는 진보, 보수의 문제나 특정 정부만의 일은 아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에너지바우처 지급 대상인 취약계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난방비를 경감해주는 방안을 찾으라는 ‘인기 영합적’ 지시를 하는 걸 보면 현 정부도 종래의 패턴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정치화된 에너지 가격에 최근 ‘이념화’라는 혹이 하나 더 붙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놓고 갈등이 깊어가면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진영끼리는 사실 여부보다 서로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주장하는 난투극이 벌어진다.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이 ‘탈원전 청구서’라고 몰아붙이자 전임 정부는 전기요금 인상요인이 커지는데도 계속 머뭇거렸다. 에너지에 진영논리가 깊이 개입되면 포퓰리즘과 책임 떠넘기기 폐습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 상황과 무관한 가격은 신호 기능을 상실한다. 가격이 오르면 가계와 기업은 에너지를 절약하고 건물의 단열을 보강한다. 에어컨을 켠 채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에너지 절약형 기술과 사업에 투자하는 벤처기업도 나오게 된다. 하지만 싼 에너지를 복지로 보고 가격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유인들이 작동하지 않는다. 탄소중립이란 큰 숙제를 위해서도 무조건 싼 에너지가 정답은 아니다.

이제라도 합리적 에너지요금 결정 시스템을 만들고 가격의 신호 기능을 복원해야 한다. 금통위처럼 정치와 행정부로부터 독립되고, 전문성을 갖춘 기구가 필요하다.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한 조영탁 전 전력거래소 이사장 등 전문가 다수가 에너지요금 결정위원회(가칭) 도입을 요구한다. 위원은 금통위에 준하는 임명 절차를 밟고, 행정부로부터 인사와 예산도 독립해야 한다. 원가(연료 가격)를 가격에 반영하고, 지금 못 하면 몇개월 안에는 미수금을 회수한다는 준칙도 마련해야 한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이렇게 한다.

마침 산업부도 9일 국회에 “에너지요금 결정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한 에너지 거버넌스(가격 결정방식)를 확립하겠다”고 보고했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용역을 바탕으로 연내 기본계획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국회도 협조해 관련법까지 만들어 에너지요금의 정치화를 끝내야 한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790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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