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5월9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집무실에서 어맨다 밀링 영국 국무장관으로부터 보리스 존슨 당시 영국 총리가 직접 쓴 책 <처칠 팩터>를 전달받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5월9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집무실에서 어맨다 밀링 영국 국무장관으로부터 보리스 존슨 당시 영국 총리가 직접 쓴 책 <처칠 팩터>를 전달받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ㅣ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큰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 하다 비슷해질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를 존경한다고 했다. 당선 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한 첫 통화에서 “국정 운영에 임하면서 늘 처칠 경을 거울처럼 생각하며 앞으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처칠이 인생의 스승이라는 존슨 총리는 며칠 뒤

사람을 보내 직접 쓴 책 <처칠 팩터>를 선물하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듯 처칠도 다면적 인물이다. 그렇기에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반면교사 삼으면 된다. 그럼, 윤 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처칠을 “거울처럼 생각하며” 국정에 임했을까? 안타깝게도 빈말이었던 것 같다.

처칠은 정치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았다. 독일의 영국 침공이 현실이 되자 히틀러와 평화협상을 하는 데 매달린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유화파들을 적폐로 모는 여론이 일었다. 새로 총리가 된 처칠은 진상 조사와 처벌 요구를 거절한다. “현재와 과거가 다투면 미래를 잃을 것입니다”라며 체임벌린 전 총리를 전시 내각에 참여시키고, 야당인 노동당과는 거국내각을 구성해 국가의 역량을 모아냈다.

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날 무렵인 1945년 7월 처칠의 보수당은 보람도 없이 총선에서 패한다. 집권한 노동당의 애틀리 정부는 무상의료인 국가보건서비스(NHS)를 도입하는 등 대대적인 복지정책을 펼친다. 와신상담하다 1951년 재집권한 처칠의 보수당은 전 정권의 진보 정책을 폐기할 수 있었다. 엔에이치에스만 해도 3년 전 도입 당시 90%의 의사가 반대한 제도여서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었다.

측근들은 처칠에게 노동당의 실책을 파고들자고 한다. 그러나 처칠은 “우리를 지지하지 않은 49%의 국민이 모두 바보일 리는 없습니다”라며 거절한다. 처칠의 보수당은 엔에이치에스를 포함해 노동당의 정책 대부분을 계승한다. 보수의 손으로 한 이 진보 개혁이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되는 ‘전후 황금기’를 일궈냈다.

지난 3월 대통령선거에서 0.73%포인트 이긴 윤석열 대통령은 압승한 듯 행동했다. 취임 후 야당 대표와 회담한 적이 없다. 야당을 국정 파트너가 아니라 제압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제대로 된 국정 비전은 내놓지 못하면서 전 정부 정책 뒤집는 것을 주요 치적으로 자랑한다.

처칠은 말이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란 것을 알았다. 취임 뒤 첫 하원 연설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했을 때 반대파 의원들도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떤 메시지를 어떤 단어로 발신할지를 놓고 침대, 욕실, 서재를 오가며 고심하는 처칠의 모습은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 잘 나와 있다.

윤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은 신선했다. 하지만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 같은 말실수를 연발했고, 메시지는 준비되지 않았다. 반지하방 수해 현장과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골목에서 한 무신경한 말, “내부총질”, “이 ××”, “바이든-날리면” 같은 분열의 말들은, 국난의 시기에 영국인의 용기를 일깨워 하나로 묶어낸 처칠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었다.

처칠은 “노”라고 말하는 부하를 곁에 뒀다. 됭케르크의 영웅 앨런 브룩 육군참모총장과는 전략을 두고 의견 충돌이 잦았지만 서로 단점을 보완하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쌍두마차가 됐다. 처칠은 권력으로 브룩의 반대 의견을 제압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면서 브룩을 임명한 것은 자신이 1차 대전 당시 해군 장관으로 겪었던 갈리폴리 패전(영국군 25만명 사상)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윤 대통령 주변엔 직언하는 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안 됩니다”라는 이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특정 언론사 전용기 탑승 배제 같은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겠는가?

처칠은 책임을 분명히 했다. 친하다고 봐주지 않았다.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밥 부스비를 식품부 차관에 임명했지만, 얼마 뒤 그가 ‘체코 금 사건’이란 추문에 연루되자 곧 해임했다. 윤 대통령은 고교·대학 후배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묻지 않고 도리어 범정부 재난안전관리체계 개편 티에프(TF) 단장을 맡겼다.

윤 대통령은 어쩌면 처칠과 아무 관계가 없는지 모른다. 존경한다는 게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공관 어딘가에서 먼지를 쓰고 있을 <처칠 팩터>를 꺼내 읽길 바란다. 4년 반이나 남았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687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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