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짐승들조차 쉴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기나 햇빛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로마공화정 시대, 대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다 죽임을 당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말이다. 그의 동생 가이우스 또한 형을 뒤쫓아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똑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세계사에는 그라쿠스 형체처럼 당대의 기득권 세력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다 좌절한 숱한 개혁가들의 극적인 서사가 있다. “신이 아니면 누가 나서겠습니까”라며 농민과 중소상인을 위한 친서민 대책인 신법을 추진하다 좌초한 중국 송대의 왕안석이 있는가 하면, 우리 역사에는 위훈 삭제와 토지개혁에 나섰다가 끝내 사약을 받은 조선의 조광조가 있다. 가까이는 “(빨간펜으로) 그냥 쫙 그어버렸어야 되는데…”라며 복지 확대를 과감히 하지 못한 걸 뒤늦게 후회한 고 노무현 대통령도 있다.


이들의 성취와 좌절의 드라마는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게 개혁”임을 실감케 한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가장 성공이 의심스러운 것, 가장 다루기 위험한 것이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는 일”이라고 설파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로서 개혁정부다. 집권 반환점(9일)을 계기로 보수언론과 야당의 낙제점에서 “이렇게 달라졌습니다”라는 정부의 자기평가 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적표가 쏟아졌다. 분명한 것은 “기대치에 미흡하고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성패를 말하기엔 향후 해야 할 엄중한 과제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혁의 초심”을 다잡고 “지난 2년6개월의 시간이 진정 개혁의 시간이었는지, 포용국가는 과연 누구를 포용했는지”를 철저히 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기실 개혁정부의 운명은 괘종시계에 매달린 시계추와 비슷하다. 개혁과 권력의 시계추를 번갈아 오가며 일정 속도로 태엽을 풀면서 궁극엔 ‘국리민복’의 시곗바늘이 앞으로 나가도록 움직여야 한다. 개혁은 ‘미지근한 개혁의 옹호자들’을 결집해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얻는 반개혁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과 반대를 제압하거나 극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창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goni@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공유경제의 시대에 특허는 공유하면 안되나요?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게티이미지뱅크 특허하면 우리는 2차 산업혁명 시대의 혁신 아이콘인 에디슨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가 백열전구, 축음기 등을 비롯해 1100여개의 특허를 가졌다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

  • HERI
  • 2021.04.29
  • 조회수 2191

‘추격 시대’의 R&D 시스템, ‘추월 시대’에 맞게 새 틀 짜자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우리나라의 달라진 위상에 맞게 기존 R&D 시스템의 틀을 새로 짜야 할 시점이다. 픽사베이 1970년대 아이들의 희망 직업을 물어보면 대통령 아니면 과학자였다. 그것은 아마 ‘로보트 태권V’...

  • admin
  • 2021.03.24
  • 조회수 2472

노동자의 삶 보장해야 산업 구조조정이 활성화된다

[이재우의 산업혁신 톺아보기] 기업 퇴출 없는 산업혁신은 불가능하다 혁신은 항상 앞만 보고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업혁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새롭게 만드는 것을 중요시하고 창업을 혁신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

  • HERI
  • 2021.03.05
  • 조회수 2415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쿠팡은 그나마 낫다니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십수년간 프리랜서 영화감독으로 일한 후배 제이(J)가 인생 2막을 위해 선택한 직업은 쿠팡맨이었다. 입사 직후 그는 자신을 ‘로켓 제이’로 불러달라며 호기를 부렸다. 주문한 다...

  • HERI
  • 2020.06.05
  • 조회수 4197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50대의 선택, 국가의 효능감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총선 더불어민주당의 180석 차지라는 압도적 승리에는 50대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구조사에서 50대는 더불어민주당 49.1%, 미래통합당 41.9% 지지로 밝혀,...

  • HERI
  • 2020.05.11
  • 조회수 4430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코로나 총선, 실종된 정치를 찾아서

한귀영 l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참 기묘한 선거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유권자들이 도처에서 무력감을 호소한다. 코로나19가 다른 이슈를 몽땅 집어삼킨 특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선거 공간에서 표출되기 ...

  • HERI
  • 2020.04.10
  • 조회수 4269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포 프레임’에 점령당한 총선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밑바닥 민심이 심상찮다. 2017년 탄핵을 지지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상당수가 돌아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 사태에 편승해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보수 야당...

  • HERI
  • 2020.03.13
  • 조회수 4002

[유레카] 코로나19 대응, “가장 무서운 약점” / 이창곤

코로나19 사태가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경제·사회적 피해 또한 막심하다. 초유의 상황이라고들 하나 이미 우리가 겪은 역사적 경험도 적잖다. 1919년 1월 <매일신보>는 스페인 독감으로 무려 742만명의...

  • HERI
  • 2020.03.05
  • 조회수 4177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능력마저 세습되는 사회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주말 20대를 함께 보낸 지인들이 십여년 만에 모였다. 고3 학부모 노릇에서 해방된 이들이 여럿이라 자축을 겸한 자리였다. 역시나 화제는 교육으로 모였다. 아이 둘을 의대...

  • HERI
  • 2020.02.18
  • 조회수 3907

[유레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이해관계자 복지 / 이창곤

지난달 21일부터 나흘간 열린 올해 다보스포럼의 열쇳말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세계경제포럼이 이 해묵은 개념을 소환한 데는 일련의 흐름이 있었다. 지난해 8월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

  • HERI
  • 2020.02.10
  • 조회수 5386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기성 정치문법 흔드는 밀레니얼 세대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선거의 시간이 다가온다. 혼돈은 여전하다. 바뀐 선거제도, 불능의 정치에 대한 심판 정서 등이 얽히면서 21대 총선이 어느 방향으로 귀결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이번 선거...

  • HERI
  • 2020.01.17
  • 조회수 4056

[유레카] 한반도 기후위기 / 이창곤

지난 주말 ‘학부모 졸업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의 졸업을 앞두고 학부모끼리 뭉친 것이다. 학부모들은 적게는 고교 3년, 길게는 중학 시절부터 6년가량을 ‘학교 공동체’ 일원으로 동고동락한 사이다. “낮에는 아이들이, ...

  • HERI
  • 2020.01.16
  • 조회수 3956

[칼럼] 문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재정정책: 재정이 장벽이 아닌 마중물이 되려면

문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재정정책 : 재정이 장벽이 아닌 마중물이 되려면   * 칼럼 내용은 아래 자료 첨부

  • HERI
  • 2020.01.13
  • 조회수 3810

[유레카] ‘국가 미래비전’의 쓸모 / 이창곤

우리나라에서 국가 차원의 중장기 미래비전이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미래학회가 함께 만든 <서기 2000년의 한국에 대한 조사연구>를 그 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초점은 과학기술...

  • HERI
  • 2019.12.26
  • 조회수 3861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정과 평등이 충돌할 때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얼마 전 만난 공공기관 노조위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난달 9일 전태일 열사 49주기에 열리는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여를 독려했더니, 젊은 조합원 여럿이 ...

  • HERI
  • 2019.12.20
  • 조회수 4657

[유레카] 반복지 재정포퓰리즘 / 이창곤

재정(public finance)이란 말은 라틴어의 ‘법정 판결로 결정한 벌금(fine)’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선 15세기 국왕이 부리는 조세징수 청부인을 지칭했고, 독일에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오늘날 나...

  • HERI
  • 2019.12.03
  • 조회수 4126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여론조사 불신, 언론도 공모자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여론조사 신뢰도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수상한’ 여론조사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한 언론사의 기사가 발단이 됐다. 특히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

  • HERI
  • 2019.11.25
  • 조회수 4298

[유레카] ‘개혁과 권력의 시계추’ / 이창곤

“짐승들조차 쉴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기나 햇빛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로마공화정 시대, 대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다 죽임...

  • HERI
  • 2019.11.11
  • 조회수 4082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울분사회 한국, 지속가능한가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울분사회’,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새로운 수식어다. 한국인의 43.5%가 만성적인 울분 상태이며 심한 울분을 기준으로 하면 독일의 4배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 HERI
  • 2019.10.25
  • 조회수 4352

[유레카] 화석연료 없는 복지국가 / 이창곤

2019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청소년을 꼽으라면 아마도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2019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선보인 그의 연설은 압권이었다. ...

  • HERI
  • 2019.10.16
  • 조회수 4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