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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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십수년간 프리랜서 영화감독으로 일한 후배 제이(J)가 인생 2막을 위해 선택한 직업은 쿠팡맨이었다. 입사 직후 그는 자신을 ‘로켓 제이’로 불러달라며 호기를 부렸다. 주문한 다음날 쿠팡맨이 직접 배달해준다는 로켓배송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때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었다. 마음이 매우 아픈 처, 어린 자녀를 건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그의 몸무게는 13㎏이 빠졌고 마라톤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은 야위어갔다. 하루 평균 130가구에 배달을 하다 보니 끼니를 거르거나 이동 중 빵 하나로 때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탓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언감생심, 주간배송이라 아침 7시께 집을 나서 퇴근하면 저녁 8시,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2년을 채우면 정규직이 된다는 희망을 품고 많은 이들이 쿠팡맨을 지원했지만 로켓 제이와 비슷한 시기 입사한 이들 중 1년 반이 지난 지금 10명 중 1명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정규직이 ‘신분’이 되어버린 시대, 2년 계약직을 거쳐 면접만 통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지만, 극심한 노동 강도에 지쳐 중도 포기하는 것이다.


쿠팡과 같은 전자상거래업체들이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 살 깎아먹기 식의 출혈을 무릅써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코로나19라는 큰 불행이 이들 전자상거래업체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비대면 언택트의 열풍 속에 주문이 폭주했고 소득이 끊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물론 로켓 제이와 같은 배달노동자의 노동 강도도 거세졌다.


코로나19 공포로 세계 곳곳에서 생필품 사재기가 발생했지만 한국에서는 사재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로 일각에서는 막강한 배송시스템을 꼽기도 했다. 로켓배송, 새벽배송 등 무한 경쟁을 통해 구축한 배송시스템이 역설적으로 전염병의 공포와 사재기를 셧다운 시켰다는 것이다. 케이(K)-방역에 빗대어 케이-배송이라는 칭송도 자자했다.


하지만 쿠팡 물류센터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하자 많은 이들은 결국 올 것이 왔다고 했다.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언택트로 끊어진 곳을 ‘연결’해주는 필수인력들로서 누군가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희생해왔다.


쿠팡 물류센터에서 대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한 이후에도 하루 일자리를 찾아 여전히 많은 노동자가 몰려든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문제의 사업장은 비정규직 비율이 97%에 이를 정도로 불안정노동의 결정판이지만 그래도 쿠팡 물류센터 알바는 ‘꿀알바’로 불리며 인기가 높다고 한다. 다른 곳과 비교해 노동조건, 임금 등이 낫기 때문이다. 소득이 끊겨 당장 하루 생계가 아쉬운 이들이 고위험을 무릅쓰고 몰려드는 현실에서 아프면 며칠 쉬라는 조언은 무용하다. 유급병가제, 상병수당 등의 제도 도입이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도 절실한 이유다. “강력한 방역은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만, 비용은 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부과되는” 아픈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다.


고위험 사업장임에도 쿠팡은 하루만 일해도 4대 보험을 보장해준다. 대다수 프리랜서, 자영업자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바로 소득이 끊기는 것에 견줘 실직 시 실업급여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셈이다.


지난 4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전화 조사(2200명 대상)를 보면, 응답자의 32.2%가 코로나19 확산 이후 소득이 감소했다. 특히 고용보험 가입 여부에 따른 차이가 눈길을 끄는데, 미가입자의 경우 65.9%가 소득이 감소했다고 응답했지만 고용보험 가입자는 30%였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9년 8월 기준, 우리나라 고용보험 가입률은 정규직의 경우 87.2%이지만 비정규직의 경우 절반 수준인 44.9%다.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 사회적 안전망이 절실한 비정규직일수록 막상 고용보험 혜택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의미다. 약자를 위한다는 사회안전망도 현실에서는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마침 정부가 전국민 고용보험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취업지원제도라는 이름하에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실직자도 곧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재난이라는 불행이 역설적으로 사회안전망 확보를 위한 정책의 장을 연 셈이다. 어렵게 다가온 정책의 시간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 구축,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hgy4215@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79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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