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20200116503371.jpg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주말 20대를 함께 보낸 지인들이 십여년 만에 모였다. 고3 학부모 노릇에서 해방된 이들이 여럿이라 자축을 겸한 자리였다. 역시나 화제는 교육으로 모였다. 아이 둘을 의대에 보낸 친구에게는 축하와 부러움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아이를 이른바 스카이대에 보낸 친구에게는 비법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특목고, 의대와 스카이 진학, 사교육, 강남 이사, 미국 유학 등 중상층 학부모들에게 어울릴 법한 화제가 한참 오갔다. 지인들은 대부분 명문대를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대학 때는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고 그 뒤에도 나름 진보적으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나 자신 무자식이 상팔자라서인지 자녀 교육에 과몰입하는 세태가 불편하다. 밖에서는 불평등을 비판하고 빈곤의 대물림을 가슴 아파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면 제 자식은 일류로 키우려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에 일조하는 86세대, ‘강남좌파’의 이중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중성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 시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쏟는 과도한 투자에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고 경제는 구조적 저성장에 처했다. 고용과 소득이 안정된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수록 그중 명문대 출신의 비중은 는다.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으로 출발해서 대기업, 정규직으로 상향 이동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첫 일자리가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 고용이 신분이 된 사회에서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다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는 지식기반경제 구축을 명분으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지고의 가치로 부상했다. 아이엠에프(IMF) 시기와 겹친다. 사람을 노동이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으로 보는 인적자본론의 관점이 보수는 물론 진보 정권도 사로잡았다. “사람에게 투자하자”는 슬로건이 진보적 개인들도 사로잡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무한 투자가 사회적 정당성도 얻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열망은 존중할 만하다. 그 열망은 자녀를 안정된 지위와 교양을 갖춘 ‘좋은 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어릴 때부터 독서와 예술, 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지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런 노력과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투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결과 물적 자본처럼 인적 자본도 세습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학력에 따라 교육 투자가 달라지고 자녀의 대학, 일자리도 영향을 받는다. 자산은 물론 재능마저 세습된다. 이제 교육은 계층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계급고착화의 기제가 되고 있다. 수많은 실증연구들이 이를 입증해왔다. 미국의 진보적 연구자 리처드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시장에서 인정되는 능력이 계급에 따라 불평등하게 육성되고 있으며, 학력과 경제력을 갖춘 상위 20%가 ‘기회를 사재기’한다고 꼬집었다. ‘부모 찬스’ 없이 좋은 인턴 자리 구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중상층 자녀들이 교육을 매개로 안정적으로 계층을 잇게 되는 사회에서는 설령 진보적인 부모들일지라도 재분배와 사회안전망 정책에 절실할 이유가 없다. 가난한 아이들이 경험하는 직업의 불안정성, 비정규직과 파견을 전전하는 삶은 다른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중상층 부모들의 교육 투자는 이렇게 나름의 합리적 명분과 근거 위에서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사회적 합리성과 충돌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출발부터 핸디캡을 씌우는 불공정한 사회, 패자 부활의 기회도 없고 상향이동의 가능성도 낮은 사회의 미래는 음울하다.


두달 뒤면 총선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기회의 공정함과 출발의 평등을 내세워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이 약속은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다. 청년들은 자유한국당이 상위 1% ‘건물주의 정당’이라면, 민주당은 상위 20% ‘부장님의 정당’이라며 비아냥댄다. 개인의 합리성을 제어해 사회적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진보를 표방한 정당의 소명이다. 부모가 누구든 출발만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가치다. 이번 총선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전과 정책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절박함이 있는가.


hgy4215@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8163.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쿠팡은 그나마 낫다니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십수년간 프리랜서 영화감독으로 일한 후배 제이(J)가 인생 2막을 위해 선택한 직업은 쿠팡맨이었다. 입사 직후 그는 자신을 ‘로켓 제이’로 불러달라며 호기를 부렸다. 주문한 다...

  • HERI
  • 2020.06.05
  • 조회수 1154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50대의 선택, 국가의 효능감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총선 더불어민주당의 180석 차지라는 압도적 승리에는 50대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구조사에서 50대는 더불어민주당 49.1%, 미래통합당 41.9% 지지로 밝혀,...

  • HERI
  • 2020.05.11
  • 조회수 1547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코로나 총선, 실종된 정치를 찾아서

한귀영 l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참 기묘한 선거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유권자들이 도처에서 무력감을 호소한다. 코로나19가 다른 이슈를 몽땅 집어삼킨 특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선거 공간에서 표출되기 ...

  • HERI
  • 2020.04.10
  • 조회수 1491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포 프레임’에 점령당한 총선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밑바닥 민심이 심상찮다. 2017년 탄핵을 지지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상당수가 돌아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 사태에 편승해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보수 야당...

  • HERI
  • 2020.03.13
  • 조회수 1426

[유레카] 코로나19 대응, “가장 무서운 약점” / 이창곤

코로나19 사태가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경제·사회적 피해 또한 막심하다. 초유의 상황이라고들 하나 이미 우리가 겪은 역사적 경험도 적잖다. 1919년 1월 <매일신보>는 스페인 독감으로 무려 742만명의...

  • HERI
  • 2020.03.05
  • 조회수 1384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능력마저 세습되는 사회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주말 20대를 함께 보낸 지인들이 십여년 만에 모였다. 고3 학부모 노릇에서 해방된 이들이 여럿이라 자축을 겸한 자리였다. 역시나 화제는 교육으로 모였다. 아이 둘을 의대...

  • HERI
  • 2020.02.18
  • 조회수 1105

[유레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이해관계자 복지 / 이창곤

지난달 21일부터 나흘간 열린 올해 다보스포럼의 열쇳말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세계경제포럼이 이 해묵은 개념을 소환한 데는 일련의 흐름이 있었다. 지난해 8월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

  • HERI
  • 2020.02.10
  • 조회수 1259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기성 정치문법 흔드는 밀레니얼 세대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선거의 시간이 다가온다. 혼돈은 여전하다. 바뀐 선거제도, 불능의 정치에 대한 심판 정서 등이 얽히면서 21대 총선이 어느 방향으로 귀결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이번 선거...

  • HERI
  • 2020.01.17
  • 조회수 1565

[유레카] 한반도 기후위기 / 이창곤

지난 주말 ‘학부모 졸업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의 졸업을 앞두고 학부모끼리 뭉친 것이다. 학부모들은 적게는 고교 3년, 길게는 중학 시절부터 6년가량을 ‘학교 공동체’ 일원으로 동고동락한 사이다. “낮에는 아이들이, ...

  • HERI
  • 2020.01.16
  • 조회수 1489

[칼럼] 문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재정정책: 재정이 장벽이 아닌 마중물이 되려면

문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재정정책 : 재정이 장벽이 아닌 마중물이 되려면   * 칼럼 내용은 아래 자료 첨부

  • HERI
  • 2020.01.13
  • 조회수 1363

[유레카] ‘국가 미래비전’의 쓸모 / 이창곤

우리나라에서 국가 차원의 중장기 미래비전이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미래학회가 함께 만든 <서기 2000년의 한국에 대한 조사연구>를 그 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초점은 과학기술...

  • HERI
  • 2019.12.26
  • 조회수 1282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정과 평등이 충돌할 때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얼마 전 만난 공공기관 노조위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난달 9일 전태일 열사 49주기에 열리는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여를 독려했더니, 젊은 조합원 여럿이 ...

  • HERI
  • 2019.12.20
  • 조회수 1466

[유레카] 반복지 재정포퓰리즘 / 이창곤

재정(public finance)이란 말은 라틴어의 ‘법정 판결로 결정한 벌금(fine)’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선 15세기 국왕이 부리는 조세징수 청부인을 지칭했고, 독일에서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오늘날 나...

  • HERI
  • 2019.12.03
  • 조회수 1603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여론조사 불신, 언론도 공모자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여론조사 신뢰도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수상한’ 여론조사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한 언론사의 기사가 발단이 됐다. 특히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

  • HERI
  • 2019.11.25
  • 조회수 1692

[유레카] ‘개혁과 권력의 시계추’ / 이창곤

“짐승들조차 쉴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기나 햇빛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로마공화정 시대, 대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다 죽임...

  • HERI
  • 2019.11.11
  • 조회수 1561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울분사회 한국, 지속가능한가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울분사회’,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새로운 수식어다. 한국인의 43.5%가 만성적인 울분 상태이며 심한 울분을 기준으로 하면 독일의 4배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 HERI
  • 2019.10.25
  • 조회수 1819

[유레카] 화석연료 없는 복지국가 / 이창곤

2019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청소년을 꼽으라면 아마도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2019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선보인 그의 연설은 압권이었다. ...

  • HERI
  • 2019.10.16
  • 조회수 1689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촛불을 들지 못한 20대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소위 ‘조국 사태’ 이후 20대 청년세대의 박탈감과 분노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일부 명문대생들은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며 촛불을 들었다. 보수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 HERI
  • 2019.09.27
  • 조회수 1882

[유레카] ‘조국 논란’의 종착점 / 이창곤

‘조국 논란’의 끝은 어디인가? 언론 보도는 연일 차고 넘친다. 하지만 공론(公論)은 없다. 검찰 수사는 마침내 ‘자택 압수수색’으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장관과 직접 연계된 객관적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지와 ...

  • HERI
  • 2019.09.25
  • 조회수 1806

[유레카] 절실한 정책결정의 ‘관제탑’/ 이창곤

대부분의 공항에는 컨트롤타워, 즉 관제탑이 있다. 관제탑의 허가 없이는 어떤 비행기도 뜨고 내릴 수가 없다. 관제탑은 항공기의 위치와 고도를 확인해 필요사항을 지시한다. 비행 전에는 조종사가 제출한 비행계획을 점검하고 ...

  • HERI
  • 2019.09.03
  • 조회수 1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