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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 식별 구역쯤 뒤통수를 맞아도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만 잘하면 사는데 별 지장 없을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다. 세계화 시대, 국제정치적 역학의 변화는 교역과 금융시스템을 통해 한 나라의 경제사정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다. 특히 환율은 ‘제로섬 게임’이어서 어느 나라가 이로 인해 이득을 보면 다른 나라는 반드시 손해를 본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의 수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국제정치적 국면이 변하는 데 잘 대응하지 못한 결과다. 지금 중국과 미국의 ‘G2’ 시대가 열리면서 한반도를 휘감는 국제정치적 ‘난기류’는 우리 경제를 30년 전 일본의 처지로 밀어 넣을 위험이 있다.

 

이어도 해상경계.jpg

(한국 해군의 율곡 이이함과 해상초계기가 이어도 근해에서 경계활동을 하고 있다. 한겨레자료사진)

 

일본은 2차 대전의 패전을 딛고 일어나 80년대 초까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를 주체할 수 없어 해외 투자에 나섰고 1985년쯤 돼서는 세계 1위의 순채권국 지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비약적 성장은 선진국들의 견제를 불렀다. 재정-무역의 ‘쌍둥이 적자’로 고심하던 미국이 주도해 1985년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인 G5 대표들은 달러화 가치를 낮추고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데 합의했다. 이 결정으로 플라자합의 직전 달러당 240엔이던 엔화가치는 1988년 120엔으로 3년 만에 100% 수직 상승했다.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 상승이 수출에 타격을 줘 불황으로 이어질 것 같자 재정을 풀고 금리를 확 낮췄다. 그런데 이 확장정책이 부동산 및 주식시장 거품으로 이어졌고, 결국 1990년대 초에 터지면서 장기불황의 서곡이 됐다.

 

일본의 곤경은 한국에겐 복음이 됐다. 한국산 공산품은 해외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높아졌고 수출주문이 밀려들어왔다. 1970년대 후반에 정부가 밀어붙인 중화학공업 중복과잉투자로 골머리를 앓던 한국 기업들은 세워놨던 공장을 풀가동하는 상황이 됐다. 급증한 수출 덕분에 만년 적자국이던 한국은 1986년 이후 내리 3년간 막대한 무역흑자를 낸다. 저유가, 저금리의 훈풍까지 더해져 우리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 이라는 이른바 ‘3저호황’을 맞았고 한 단계 도약했다. 민주화와 노동운동 활성화 덕분이기도 했지만 근로자의 연봉이 1990년대가 시작될 때쯤 2배로 뛰었다. 돈이 넘치며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었고, 주변에서 하나 둘 엑셀, 프라이드 같은 차를 몰고 나오는 ‘마이카’ 시대도 열렸다. 강대국의 경제력 조정 과정에서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영문도 모른 채’ 횡재를 한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국제정치적 세력 조정이란 점에서 같지만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1980년대 말과 정반대이다. 프라자합의 당시는 미국이 아시아의 ‘불침항모’ 일본과 유럽의 교두보 서독의 부흥을 위해 2차 대전 이후 취해오던 경제적인 관용 정책이 한계에 다른 때 였다. 지금 국제정세의 변화는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굴기’와 새로운 미-중 세력다툼의 시작이다. 소련이 해체된 뒤 유일(unipolar)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리던 미국 눈에 힘이 세진 중국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이 오바마 2기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 외교 전략’이다. 그런데 빚에 허덕이는 미국은 중국을 대적하기 버겁다. 그래서 중국 뿐 아니라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저지에도 일본이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국제교역에서 중국 포위 전략이라 할 수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성공적인 출발을 위해서도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런 사정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로의 전환을 노리는 아베 정권의 염원과 맞아떨어졌다. 미국은 아베의 ‘집단자위권 행사’ 정책을 지지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미국과 일본의 국제정치적 밀착은 엔화 약세라는 경제적 ‘부록’을 달고 왔다. 일본은 엔화가치 하락이 절실하다. 지난해 말 집권한 아베 정권이 천명한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시장에 돈을 공격적으로 푸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이 수익성을 회복하고 투자와 임금인상으로 이어져 민간소득을 끌어올리자는 전략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가 엔 약세와 주가 상승이다. 올 상반기 일본 상장기업의 순이익이 전년 동기대비 2배 이상 증가한 것을 보면 아베의 이런 전략이 먹혀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최근 우리나라에는 “환율을 조작하는 지 지켜보겠다”고 눈을 부라렸지만, 아베 정권이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는 엔화 약세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아 주고 있다.

 

일본 정치인.jpg

 

엔화 약세가 일본에게는 20년 불황에서 탈출하는 교두보가 될 수 있겠지만 한국에는 큰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 1년 전인 지난해 말 달러당 80엔대이던 엔화는 103~104엔대로 가치가 하락했다. 반면 올 초만 해도 1450원대 이던 100엔당 원화 환율은 1020원대로 떨어져 원화 가치가 1년 남짓 만에 40% 올랐다. 우리와 경합하는 일본 제품은 엔화 약세를 디딤돌 삼아 세계시장에서 활개를 치는 반면 한국기업들은 버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 당장 엔저를 등에 업은 도요타의 캠리 승용차가 현대차의 소나타 보다 수입가격이 싸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일 양국간 무역비중이 줄어들었고, 일본의 한국에 대한 포트폴리오 투자가 늘어나 엔저의 부정적 영향이 크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또 지금까지 해 왔듯이 품질과 생산성 향상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이번 엔저는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큰 흐름에 얹힌 것으로 일시적 등락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번 엔화 약세가 10년 정도는 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국제정치의 현실은 냉정하고 강대국의 계산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갈릴 지경이 된 것은 100 여 년 전 구한말과 비슷하다. 19세기의 초강국 영국은 1885년 느닷없이 우리 남해의 거문도를 무단 점령해 2년간 군대를 주둔시킨다. 당시 영국의 신경을 건드리던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점령이었다.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설(1884년 조-러수호조약)도 의식한 조처였다. 이후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길 원치 않았던 영국은 일본을 끌어들여 1901년에 1차, 그리고 1905년에 2차 영일동맹을 맺는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익’(식민지)은 이렇게 초강대국 영국에 의해 승인됐다.

 

우리 경제가 엔저 장기화로 절단이 나도 미국이나 유럽이나 우리를 도와줄 리가 없다. 구한말 조정은 거문도 점령 사실을 뒤늦게 알고 열강을 끌어들여 해결하고자 도움을 요청했으나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대영제국을 상대로 실익 없이 맞설 나라가 없었다. 청나라는 “영국의 거문도 주둔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침묵을 지켰다. 미국은 “조선에 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았으니 영국의 행동을 무조건 비난할 수 없다”고 했다. 고종은 마키아벨리의 면모가 있었다지만 사실 국제정세에 감감했다.

 

요즘 여권에서 조차 “누가 외교를 하고 있느냐?”는 탄식이 나온다. 피를 나눈 ‘혈맹’ 이라던 미국은 우리의 애타는 눈빛을 피하며 일본 뒤쪽으로 가서 섰다. 한복 패션도 좋고 영국 여왕의 마차를 얻어 타보는 것도 좋지만 큰 그림을 놓치면 구한말의 실책을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한강의 기적”도 일장춘몽이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커뮤니케이션 박사)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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