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으로 1천여 만 명이 사망하는 미증유의 참화를 겪은 인류는 더 이상의 전쟁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국제연맹을 만든다. 하지만 불과 20여 년 만에 6천만 명이 사망하는 2차 대전에 다시 휘말려 든다. 역사의 익숙한 패턴대로,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제적 충격이라던 2008년 금융위기는 잊혀져 가고 있다. 금융이 부풀린 거품이 그대로 정부의 부채로 이전돼 뭇나라가 재정위기에 노출돼 있고, 양적완화란 비정상적인 통화정책으로 풀어 놓은 3조 달러가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지만, 달라져야 했을 많은 것들은 위기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최근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전 재무장관이 뉴욕 월가의 금융회사에 취직 한 것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이 거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내년 3월부터 사모펀드(PEF) 워버그 핀커스의 전략담당 대표로 합류하는 가이트너는 오바마 1기 행정부(2009~2013)에서 4년간 금융위기 수습을 총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런 자가 물러난 지 1년여 만에 금융회사로 옮긴 것은 자신이 자리에 있을 때 최우선적으로 개혁했어야 할 ‘악습’ 에 거리낌 없이 몸을 실은 것이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밴 버냉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왼쪽)과 한 회의에서 나란히 앉아있다. AP 뉴시스/ 한겨레 자료사진)
워버그 핀커스는 레버리지드 바이아웃(LBO)을 전문으로 하는 자산규모 350억 달러의 사모펀드다.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하고 5~10년 뒤 이를 팔아 이익을 남긴다. 우리나라에 와서 외환은행과 극동건설 등을 인수했다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되판 론스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레버리지드’ 란 말이 보여주듯 부채로 자금을 조달해 금리정책에 민감하고, 남긴 이익 중 최대한 세금을 줄여야 해서 세법에 민감하다. 이 밖에도 기업을 사고 파는데는 관청하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무수히 많다. 이런 곳에서 막대한 연봉을 제시하며 데려갔을 때, 그 용도는 자명하다. 2008년에는 뉴욕 연준 총재를 지냈고 그 후 재무장관을 지낸 정보력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안 될 일도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는 ‘고삐 풀린’ 금융이 사고를 친 것이다. 고삐가 풀렸다는 말은 묶어야 할 곳을 느슨하게 풀어두었다는 뜻이다. 관리와 감독을 해야 할 곳이 일을 제대로 안 한 결과 ‘시한폭탄’이나 한 가지인 파생금융상품이 선진 금융기법이란 이름으로 활개를 쳤다. 규제가 느슨해 진 이유는 무엇보다 금융시장에서 공(公)과 사(私) 구분이 무너졌기 때문이고, 이는 어제 감독을 책임진 공무원이 오늘은 담당 회사의 임원으로 출근하는 ‘전관예우’와 ‘회전문’ 인사에서 비롯된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회장을 하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 경제정책 보좌관, 재무장관을 지내고 다시 시티그룹 회장으로 돌아간 로버트 루빈이나, 부시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하다 퇴임 후 사모펀드 서버러스의 회장으로 간 존 스노 같은 이들이 공과 사를 뒤섞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는 금융위기를 일으킨 책임이 있다.
많은 비판과 반성이 있었지만 이런 관행은 거의 고쳐지지 않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금융규제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을 지낸 메리 샤피로 역시 사임한 지 4개월이 채 안 된 올 초 금융컨설팅 전문업체 '프로몬토리 파이낸셜 그룹'에 임원으로 영입됐다. 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금융산업규제기구(FINRA) 등 미국의 대형 금융 규제기관 세 곳을 모두 이끌고 국회의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피로가 금융회사를 위해 사실상의 로비스트처럼 뛸 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심각한 이해충돌이 빚어지리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물렁한 인물들이 위기 이후 금융개혁을 주도했으니 결과는 뻔 한지도 모른다.분노에 찬 시민들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 ‘점령하라’(Occupy) 시위를 벌였지만 월가의 방종을 규제하는 법들은 로비에 밀려 껍데기만 남았다. 위기의 주범인 파생상품 관련 규제만 해도 월가는 최근 3년 동안 의회 및 금융당국 관계자들과 80차례 이상 만나며 전방위적 로비를 벌여 결국 규제 수준을 더욱 낮추는 데 성공했다. 특히 5월 초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를 통과한 H.R. 992 법안이 파생상품 관련한 도드-프랭크 규제법을 사실상 무력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의 로비가 하두 성공적이다보니 미국의 금융정책을 “월가가(정확히는 그들이 고용한 로비스트들이) 작성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뉴욕타임즈>가 이메일을 입수해 분석한 것을 보면 5월 초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를 통과한 한 법안은 “시티은행 작품”이 명백했다. 이 법은 전체 85개의 법조문 가운데 70개가 시티그룹의 제안을 담고 있다. 특히 2개의 핵심적인 조문은 글자까지 시티그룹의 제안을 그대로 옮겼는데 단지 바꾼 2개의 단어는 단수를 복수로 만든 것 뿐이었다. 의회와 당국이 이렇게 된 데는 바로 직전까지 상관으로 모시던 사람을 앞세우고 들어오는 금융회사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전관예우와 회전문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역시 퇴임한 부총리나 관료, 고위 법조인들이 로펌이나 회계법인의 고문으로 영입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부하를 상대로 로비를 하는 일이 흔하다. 한미은행 매각, 외환은행 매각 등 굵직한 국내외 거래에서 이들의 역할은 적지 않게 논란이 돼 왔다. 장차관급 고위 관료가 아니더라도 관료들은 자신이 관할하던 업계를 퇴임 후 자리를 만들어 줄 ‘꿀단지’로 보고 있다. 줄줄이 낙하산으로 감사 등 경영진으로 들어가서는 자신이 몸담던 기관을 상대로 로비를 하다보니, 동양증권의 기업어음(CP) 판매와 같이 진작에 막아야 했을 일을 차일피일 봐주다 국민들의 피해가 늘어나는 것이다.
“업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 도움이 된다” 거나 “관직에 있을 때 쌓은 전문성을 활용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 ‘회전문’을 드나드는 관료들의 항변이다. 하지만 공과 사의 구분이 모호해 진 곳에서 남는 것은 사욕과 들판의 이전투구 뿐이다. 퇴임 뒤 자신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기관을 대상으로 로비를 할 생각을 하는 관료들은 애초 공직에 가지 말았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최소한도로 말해 ‘공익의 배신자’들이고 심하게 말해 ‘범죄자’들이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커뮤니케이션 박사)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