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하이라이트

 

러시아에서 발생한 내전의 와중에 구 소련 강경파 손에 들어간 핵미사일 기지. 이에 대응해 러시아 근해로 출동한 미국 핵 잠수함 앨러바마호. 적의 어뢰공격을 받아 선체 일부가 부서지고 본토 국방부와의 통신이 끊긴 조종실. 몰살의 위기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선제 핵공격을 명령하는 함장과 이에 반대하는 부함장. 수병들은 두 편으로 갈리고 함장과 부함장은 한 번씩 서로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감금한다. 통신장비 수리는 지연되고 긴장은 극을 향해 달린다.

 

영화 <크림슨 타이드>(1995) 는 위기 상황에서 조직이 흔히 보이는 반응과 의사결정 과정의 예를 잘 보여줘 경영학(조직행동) 수업에 자주 보교재로 활용된다. 긴박한 상황에서 램지 함장(진 핵크만 분)이나 헌터 부함장(덴젤 워싱톤 분)이 내린 판단은 누가 옳고 그르다 말하기 어렵다. 통신 두절로 최종 명령은 받지 못했지만 반군이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을 날리기 전에 선제공격하자는 함장이나 “오판하면 우리가 3차 대전을 유발하게 된다” 며 반기를 든 부함장 모두 일리가 있다. 다만 해군 핵잠수함에도 부하가 상사에게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와, 함장과 부함장이 함께 동의해야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규정(시스템)이 있었다. 그렇기에 정보가 제한된 급박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이 이뤄질 수 있었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크림슨 타이드.jpg

 

웅진, STX에 이어 동양그룹까지 최근 대기업들이 잇따라 좌초했다. 금융시장에는 이들 외에도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할 재벌그룹 너댓 곳의 명단이 흘러 다닌다. 무너진 기업들은 몇 년 전부터 위기의 골이 깊어져 왔지만 경영자의 오판으로 대응할 시기를 놓친 공통점이 있다. 설립된 지 56년 만에 4만여 명의 개인투자자에게 수조원의 피해를 떠넘기고 공중분해하게 된 동양그룹만 해도 지난 몇 년 간 동양증권, 동양매직 매각협상 등에서 7번 쯤 회생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살리지 못했다. 문제는 오너 총수를 정점으로 짜인 재벌의 조직문화와 의사소통 구조는 늘 이런 오판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본부 등 가까운 거리에서 총수를 보좌해 본 이들은 재벌의 의사결정이 군대, 경찰에 못지않게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라고 말한다.

 

우선 재벌 그룹에서 발신자는 오직 회장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신자다. 회장만 의견을 낼 수 있고 나머지는 주석을 달거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국내 굴지의 재벌 계열사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오너가 어느 날 ‘이런 사업이 괜찮을지 한번 검토해 보라’고 했다. 무얼 제일 먼저 했겠느냐? 그 사업 자체보다는 오너가 무슨 생각으로 그 지시를 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같으면 긍정적 보고서를 올리고, 그저 그런 것 같으면 안되는 쪽으로 보고한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수천~수만 명이 근무하는 대기업의 지적능력이 오너 회장 한명의 지능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동양그룹 역시 한 때 ‘주파수 경영’이 모토였다고 한다. 회장이 뭘 원하는 지 아랫사람이 ‘주파수’를 잘 맞춰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회장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직원은 천연기념물이 된다. 말 한마디 삐끗하면 당장 짐을 싸야 하는 걸 잘 알기에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보고를 늦춘다. 그러다 보니 울려야 할 ‘비상벨’은 항상 고장이 나 있다. 동양증권은 지난 여름 현재현 회장에게 구조조정을 더 늦추면 ”회장님이 서울역 앞 노숙자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한국 기업사에 기념비가 될 용기 있는 ‘쓴소리’ 였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판에 몰려 지른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그 즈음 동양 계열의 한 최고 경영자는 ”회장님이 사재를 넣어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보고를 했다. ‘직언’ 같지만 사실은 물러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게 보고를 하면 곧 잘릴 테고, 그게 차라리 훗날 더 큰 덤터기를 피하는 방법이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너 회장만이 그룹에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다 보니 내부의 경쟁은 오너의 눈과 귀를 장악하는 게임이 되어 버린다. 오너의 귀에 착착 감기는 말을 하는 일부는 측근이 돼서 승승장구하고 나머지는 열패감에 이를 갈며 권토중래를 노린다. 이러다 보면 공조직이나 제도, 시스템이 일을 하기 보다는 회장과 가까운 ‘비선’(秘線)이 중요한 결정을 좌우한다. 심지어 상무 이사급에 불과한 회장의 측근이 30~40년 잔뼈가 굵은 계열사 사장을 날리는 일도 벌어진다. 동양그룹에서도 김철(39, 동양네트워크 대표)이란 30대의 ‘숨은 실력자’가 유명무실한 공식조직을 대신해 힘을 발휘했음이 사태가 불거진 뒤 비로소 드러난다. 김 대표는 살림만 하던 이혜경 부회장(현회장의 부인, 창업자의 첫째 딸)이 2007년 경영에 참여한 뒤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 상무급에 불과한 그는 이 부회장의 절대적 신임 아래 구조조정 등 온갖 결정에 관여했고, 지금의 사태를 불러오는데 큰 책임이 있다고 동양의 전,현직 임직원은 보고 있다.

 

동양증권 침묵시위.jpg  

(동양증권 임직원 200여명이 3일 오전 서울 성북구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동양시멘트 법정관리 철회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총수를 정점으로 한 재벌 체제는 신속하고 결정, 효율적인 집행, 단기간의 손실을 견디고 장기발전을 도모하는 인내력 등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경제적 조직이다. 아울러 재벌 체제에는 우리 경제가 1960년대 이후 압축성장해 온 경로가 담겨있기에 시간이 흐르면 퇴화될 후진적인 조직행태라는 주주자본주의자들의 주장에 100%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 같은 조직문화나 의사결정 구조는 앞으로의 경영환경과 자꾸 충돌할 수밖에 없다. 세계시장을 휘젓던 소니, 닌텐도, 노키아, 블랙베리 같은 강자가 불과 몇 년 만에 좌초 하듯 혁신의 주기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유연하지 못하고 닫힌 조직은 미래가 없다.

 

잘 나가는 첨단 기업 구글은 매주 금요일 전 세계 3만 명의 전 직원이 참여하는 'TGIF' 행사를 연다. 정원이나 휴게실에 모여 함께 맥주를 마시며 직급이나 팀에 관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데 여기에는 최고 경영자(CEO)가 반드시 참석한다. 이를 통해 직원들은 회사의 실상을 파악하고 목표를 공유하게 된다. 우리에겐 구글 못지않게 잘나가는 삼성전자가 있다. 3분기에 10조1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에너지기업이나 금융회사가 아닌 제조업체가 분기에 10조원 대 이익을 올린 것은 애플에 이어 두 번째로 매우 대단한 성취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잘 할수록 “이 회사가 잘못되면 나라 경제는 어찌되나” 하는 걱정은 커진다. 조직의 화석화로 어려움을 겪는 동양 등의 사례가 삼성그룹에도 타산지석이 되길 바란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커뮤니케이션 박사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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