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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사는 이상한 나라에는 ‘공약 재판소’ 가 있다. 여기서는 정치인이 공약을 지키지 않으면 유권자의 제소를 받아 최고 재판관들이 심리하고 판결한다. 양형은 정치인의 임기를 단축하는 것.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공약을 파기한 경우는 “임기 2년 단축”, 작은 공약을 위반하면 “6개월 단축” 등으로 판결한다. 불가항력인 경우는 정상을 참작하기도 하지만, 공약을 파기하면서 임기는 다 채우겠다고 나서는 정치인은 차츰 사라졌다.

 

이상한 나라가 ‘공약 재판소’를 도입한 것은 정치인의 공약파기와, 유권자의 건망증이 ‘고질병’이 되었기 때문이다. 투표용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정치인들은 심각한 얼굴로 사과 몇 마디 하고는 공약들을 거둬들였다. 언론인과 학자들은 “잘못된 공약은 지키지 않는 것이 용기”라며 거들었다. 심지어 “선거가 끝났으면 공약은 잊어라!” 라고 한마디 하는 게 참된 지식인의 본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모처럼 선거가 없는 올해는 공약 백지화하기 좋은 때인 듯 하다. 7개월 전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대선 공약은 잇따라 왜소화하고 있다. ‘65살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과 ‘4대 중증질환 치료비를 정부가 부담하겠다’는 핵심 복지공약도 바람 앞의 등불신세다. 박 대통령은 26일 국무회의에서 이들 공약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공식화 한 뒤 그 까닭을 국민에게 설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에 이어 복지공약까지 이렇게 위축돼 핵심 대선공약들이 연속해서 뒤집히는 모양새다.

 

  노인빈곤2.jpg

  (폐지 줍는 노인 / 한겨레 이정용 기자)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 유야무야 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우리 현대사에 보수의 손으로 이루는 진보·개혁을 볼 기회가 유실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선점하거나 차용해 톡톡히 효과를 봤다. 야권이 제기할 핵심 의제를 여당 후보가 얘기하니 야당 후보들은 차별성을 만들어내기 힘든 선거였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있는 박 후보는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 이란 이미지까지 갖고 있었다. 박 후보를 찍지 않았어도 박 후보의 당선이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위안 삼은 유권자도 많았다.

 

사실 서구의 예를 보면 복지나 공공의료, 공영방송 같은 진보의 정책이 보수의 손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허다했다. 보수가 진보 정책을 추진하면 재계나 기득권층의 저항을 상대적으로 무마하기 쉽다. 보수나 진보나 완전히 만족은 못해도 “그만하면 됐다”는 선에서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에 갈등이 해소되고 국민통합이 촉진된다. 이렇게 마련된 정책이나 제도는 수명도 길고, 합의된 기대치가 있기에 효과도 높다. 보수가 하는 진보 개혁은 그래서 한 사회가 분열과 대립을 털고 수십 년 동안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2차 대전 직후의 영국이 그러했다.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은 파시즘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종전 직전인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배한다. 1951년까지 집권한 노동당 애틀리 정부는 대대적인 진보정책을 펴나간다. 통신, 항공, 전력, 석탄, 가스, 철도, 도로 및 철강업 등 고용인구의 20% 정도에 해당하는 산업을 국유화해 영국은 유럽에게 가장 국유화율이 높은 나라가 된다. 또한 무상의료인 국가보건서비스(NHS)를 도입하는 등 복지제도도 크게 확대했다.

 

처칠-위키피디아.jpg 

(처칠 전 영국 수상/  위키피디아)

 

6년간 와신상담하다 1951년 다시 집권한 보수당은 전 정권의 진보정책을 되감을 수도 있었다. NHS 만해도 3년 전 도입 당시 의사의 90%가 반대한 제도여서 이를 해체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칠의 보수당 정권은 노동당의 정책을 대부분 계승한다. 처칠은 첫 기자회견에서 “진보 정권의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본래 노동당의 정책을 반대했다. 하지만 국민의 동의 아래 노동당 정부가 실시해 온 복지, 경제, 노동정책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처칠의 보수당이 계승한 진보· 개혁정책은 무성한 가지를 뻗고 자라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1970년대 후반 대처리즘이 나오기까지 30여년 지속된 ‘자본주의 황금기’의 토대가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보수당이 그대로 살려둔 NHS 만 해도 밖에서는 여러 비판이 나오지만 영국 국민들 다수는 만족하며 사랑하는 의료시스템이 됐다. 지난해 7월 수십억 세계인이 지켜보는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간호사 600여명이 침대 수백 개를 끌고 나와 NHS를 형상화한 것도 이 무상의료제도를 영국인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 지를 보여준다.

 

한 시대가 요구하는 일이라면 정책의 색깔을 가리지 않고 실천하는 서구의 보수당은 책임 있는 정치집단으로 국민에게 인식돼 다양한 계층의 꾸준한 지지를 받는다. 이렇게 핵심 지지층의 단기적 이해를 조정하면서 사회를 장기적, 전략적 안목을 갖고 관리해 나가는 것이 보수가 금과옥조로 삼는 경제성장에도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박 대통령이 노령연금이나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경제민주화 핵심 조처를 착실히 이행했다면 분배나 복지 정책을 넘어 훌륭한 성장정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초연금만 해도 그렇다. 노인가구의 평균소득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중 29위(국민연금연구원 2013. 7 자료)인 상황에서 노인에게 지급되는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은 대부분 즉시 소비돼 내수를 키우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몇몇 수출 대기업이 끌고 가는 외바퀴 경제를 내수와 수출의 쌍끌이 경제로 전환하는 발판이 됐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내세운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시대정신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여당과 야당이 의제도, 정책도 비슷하게 내놓고 다투는 ‘이상한’ 선거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시대정신을 파악해 표를 얻는 방법까지는 알았지만 그 너머를 보려하지 않는 한국 보수의 발육부진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커뮤니케이션 박사)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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