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대선 의제를 말하다]-④비정규 노동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HERI)이 19대 대선 의제를 짚어보는 온라인 기획 ‘HERI, 대선 의제를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청년·노동·교육 등 각 분야 현장 전문가들이 주요 후보 공약을 포함한 대선 의제를 비판적으로 점검합니다.

문재인 후보님께.

저는 요즘 너무 많은 죽음 때문에 아픕니다. 올해 1월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한 학생이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객센터에서도 가장 감정노동이 심한 해지 방어 부서에 현장실습생을 보낸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죽음의 책임을 개인과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원청인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LG유플러스의 태도는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년 말 경북 경산 CU편의점에서는 한 젊은 노동자가 일하다 흉기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피할 틈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야간에 홀로 일해야 하는 알바 노동자들의 안전에 대해 기업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서울 구의역에서 열아홉살 노동자가 스크린도어를 홀로 수리하다 열차에 치어 숨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계속 죽음을 목도합니다.

이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어갑니다. 말도 안되는 노동조건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죽습니다. 위험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기업의 무책임으로 인해 한 해 24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숨지는데, 30대 대기업 산재 사망자의 95%는 하청노동자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만과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비정규직이나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비상사태’ 아닐까요?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아사히, 세종호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현대차 등 장기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16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광빌딩 옥상 광고탑에 올라 고공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4일부터 복직과 비정규직 철폐 등을 요구하며 사흘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아사히, 세종호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현대차 등 장기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16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광빌딩 옥상 광고탑에 올라 고공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4일부터 복직과 비정규직 철폐 등을 요구하며 사흘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재인 후보님.

후보님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많은 공약을 내놓으셨지만, 비정규직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고민한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저는 후보님께 ‘파견법’과 ‘기간제법’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19대 국회에서 문재인후보님은 “기간제법과 파견법은 악법 중의 악법”이라고 하셨더군요. 맞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이 법은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정규직 고용’이라는 원칙을 무너뜨리고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는 것을 선포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정규직 사용이 가능해진 순간 기업들이 다양한 형태로 비정규직 채용을 늘리는 것은 필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던가요. 시장권력인 재벌 대기업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대를 짓밟고 그 법을 통과시킨 결과는 어떠한가요? 노동자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신규 취업자 열에 일곱은 비정규직입니다. 비정규직들은 위험한 일에 내몰려 죽어갑니다. 월 200만원 미만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절반이나 되고,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200만명입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노동입니다. 고용이 불안하니 미래도 꿈꾸지 못합니다. 이처럼 많은 비정규직이 미래를 잃고, 자존감을 훼손당하고, 삶의 가치를 빼앗기고, ‘죽음’ 곁에서 일해야 한다면 이 사회에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는 기업과 노동자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은 기업이 원하는 때에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만이 있어도 살아남기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후보님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놓으셨더군요. 그런데 이미 차별시정제도가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법에 호소하는 순간 해고되기 때문에 그 제도는 허울만 남아있습니다. 법이 없어서 차별당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차별당하는 것입니다. 혹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뭉쳐서 노조를 만들려면 또다시 해고의 위협에 시달려야 합니다. 노조할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들은 고공농성으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정규직 확산이 지금의 헬조선을 만든 것입니다.

비정규직의 고통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심화되었을지 모르겠으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유산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후보님에게 과거의 책임을 묻기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문재인 후보님이 대통령이 될 경우, 기간제와 파견제 이후 확산된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문재인 후보님은 ‘비정규직의 사용 사유를 제한하자’는 공약도 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사용 사유를 제한한다고 하면서 비정규직 사용을 합리화하는 기간제법과 파견법을 그대로 두는 것은 모순된 주장입니다. 비정규직을 정말로 줄이고자 한다면 이제는 ‘정규직 고용’이 원칙이라는 점을 밝혀야 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만들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더욱 개악한 파견법과 기간제법을 이제는 없애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지금 경고음을 울리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고민해주십시오. 광화문 광고탑에 올라 곡기를 끊고 ‘비정규직을 철폐하라’고 외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불안정한 일자리 때문에 미래의 꿈을 꾸지 못하는 청년노동자들의 고통을 살펴봐주십시오. 비정규직 문제가 수많은 공약 중 하나가 아니라, 헬조선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비정규직 고용형태로부터 파생된 고통을 일부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없애려는 노력을 기울여주십시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바라는 것은 ‘지금과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