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기간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전략은 수도권에 집중된 주요 기관, 기업, 기반시설을 지역에 유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공공기관과 공기업을 지역에 이전한 혁신도시가 만들어졌고, 전국 곳곳에 산업단지와 자유무역단지, 국제자유도시, 경제자유구역 등이 지정됐다. 주요 간선도로뿐 아니라, 고속철도와 바다를 가로지르는 교량 등의 대규모 교통시설도 여러 지역에 건설됐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때로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혁신도시는 인근의 인구와 자원마저 빨아들였고, 지역에 일부 생산시설과 영업장을 두고 있는 기업은 창출한 부의 상당 부분을 본사가 있는 수도권으로 이전했다. 고속철도를 비롯한 교통시설은 오히려 수도권 접근성을 높였다. 결국 지역을 위한 정책이 거꾸로 지역에서 창출된 부가 유출되는 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이런 기존 정책의 실패 속에서 새로 등장한 대안 담론이 ‘지역순환경제'이고, 이는 지역에서 창출된 경제적 가치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해당 지역에서 분배, 소비, 생산으로 이어지며 순환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이런 지역순환경제의 체계를 만드는 데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지난 20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이뤄졌다. 바로 ‘자립과 공생의 지역순환경제를 위한 농촌기본소득의 역할'을 주제로 열린 제3회 농촌기본소득 정책포럼이다. 이번 포럼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경기도농수산진흥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민간 정책연구소 랩2050, 고려대 정부학연구소, 지역재단, 국회 기본소득 연구포럼, 경기도의회 기본소득 연구포럼 등이 함께 마련했다.
농촌기본소득은 경기도가 올해 하반기에 시행을 계획하고 있는 정책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개별적·정기적으로 지급되는 현금'을 의미하고, 농촌기본소득은 한 농촌지역 안에서 ‘모든 주민'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현금 급여를 뜻한다. 경기도는 농촌 1개 면 지역에 4000여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1인당 월 15만원씩 5년간 농촌기본소득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겐 해당되지 않지만, 특정 집단 내에서 무조건성, 개별성, 정기성, 현금성 등의 요건을 충족하는 급여를 ‘범주형 기본소득'이라고 한다. 그간 핀란드나 인도, 나미비아 등에서 실업자나 빈곤층 대상으로 범주형 기본소득을 지급한 적이 있었으나, 경기도의 시도는 한 지역 내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경기도가 농촌기본소득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인 보건복지부와 사회보장제도 신설 협의를 거친 뒤 경기도의회에서 조례안을 승인받는 절차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날 포럼에선 중앙정부와 경기도의회의 인사가 축사를 통해 농촌기본소득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김사열 위원장은 “농산어촌 주민들은 국가의 산업화 과정에서 외면되어 생존의 어려움에 처했다”며 “경기도가 오이시디(경제협력개발기구) 36개 가입국 중 최초로 농촌지역 기본소득 실험의 실시를 앞두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노력이 농산어촌 주민의 ‘내셔널 미니멈'(정부가 보장하는 최저생계수준)을 확대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정승현 경기도의원은 “재원 부족, 노동의욕 상실 등 (기본소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농업과 기본소득을 결합한 농촌기본소득은 우리 농업을 지켜내고 기본소득 실증 사업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발제를 맡은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선 지역순환경제의 조건부터 설명했다. 그는“소득을 지역 내에서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되도록 생산과 영업 등도 지역 내에서 이뤄져 이 안에서 돈이 돌고 도는 것이 지역순환경제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역순환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교육, 문화, 의료, 복지 서비스 등이 지역 내에서 원활하게 이뤄져야 하고, 높은 수준의 자치 역량과 주민들의 높은 관심과 참여도 등도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됐다.
이런 지역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제도로 양 교수는 농촌기본소득을 주목했다. 그는 “혁신도시와 같은 기존 국가균형발전 정책이 도리어 도농 간 불평등을 확대했고, 농촌을 지원하는 공익직불금 제도 역시 농민들 간의 양극화를 조장한 측면이 있다”며 “농촌기본소득의 시행이 기존 균형발전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고, 새로운 지역순환경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지역순환경제라는 의제가 ‘지역화폐'를 통해 제기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양 교수는 “지역화폐를 도입하는 지자체들이 확산되면서 지역에서 돈이 돌고 도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지역화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도 지역경제가 자기완결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는 ‘지역화폐와 기본소득의 만남, 지역순환 경제시스템의 가능성'이란 제목의 발제에서 현재 논의가 분분한 지역화폐의 효과를 다뤘다. 우선 강 교수는 지역화폐가 처음 기본소득과 만나게 된 성남시의 2016년 청년기본소득 도입 상황을 설명했다. 기본소득을 추진하고자 했던 성남시는 중앙정부나 입법부인 국회와는 달리 자체적으로 조세체계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무리 없이 마련할 수 있는 예산 범위 내에서 수혜 대상이 제한적인 정책을 설계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등장한 제도가 만 24살을 대상으로 한 청년기본소득이었다. 문제는 청년을 지원하는 제도에 대한 공감대였다. 지역화폐를 통해 청년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소상공인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고, 궁극적으론 청년과 소상공인을 복지 확대에 동의하는 지지세력으로 끌어올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강 교수는 “지역화폐를 접목한 청년기본소득은 청년과 소상공인의 열성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다만 지역화폐의 효과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송경용·이환웅 부연구위원이 발간한 <지역화폐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이란 보고서에서는 지역화폐 도입으로 얻는 효과는 인접 지자체 소매점의 매출 감소를 대가로 하고 있고,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지역 내 소매점으로만 제한되며 지방정부가 지역화폐를 발행하며 쓰는 비용을 고려하면 부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보고서는 각 지역에서 발행되는 지역화폐를, 전국적으로 통용되면서도 대형마트 등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온누리상품권으로 일원화하고, 부정적 효과가 큰 지역화폐 관련 예산으로 소상공인에게 직접 지원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강 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지역화폐의 목적은 타 지역의 매출을 뺏어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에서 대기업에 몰리던 매출을 소상공인에게 이전시키는 것”이라며 “발행비용을 들이더라도 대기업에서 소상공인에게 매출이 이전되는 효과가 발생하면 목적에 맞는 좋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향후 디지털의 형태로 발행되는 지역화폐가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자체가 예술인 지원 정책을 만들어도 대상을 선별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고, 지역 언론은 대부분 지자체의 광고에 의존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예술인과 언론을 직접 지원하기보다는 지역의 언론 구독과 공연예술 관람에만 사용할 수 있는 지역화폐를 발행해 주민들에게 지급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발제에선 농촌기본소득이 지역에서 미치는 경제적 효과를 새로운 지표로 측정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서재교 우리사회적경제연구소 소장(랩2050 연구위원)은 기존의 경제적 승수효과를 지역에 적용한 모델을 발표했다. 승수효과란 어떤 요인의 변화로 인한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의미하는데 경제학에선 투자나 소비 등이 경제적 총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뜻한다. 승수효과를 지역에 적용한 지표인 LM3는 영국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지역의 통화흐름을 측정하기 위해 2002년에 개발한 것이다. 서 소장은 “한국의 경우 쇠퇴하는 농촌지역에 그동안 많은 예산이 투입됐는데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는 평가가 많고, 이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도구로서 지역승수효과를 볼 수 있는 LM3를 활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고, “농촌기본소득이 거래 정보가 전산에 담기는 마그네틱 카드 형태의 지역화폐로 지급되면 승수효과 측정이 용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금수당을 기존 화폐가 아닌 지역화폐로 지급할 때 승수효과가 더 높다는 사례도 있다. 양준호 교수는 “스페인 빈곤지역에서 1000가구를 대상으로 소득(가구 구성과 재정 상황에 따라 월 100~1676유로 등 차등 지원)을 지급한 비민컴 실험에서 지급액의 25%를 지역화폐인 렉(REC·Recurs Econòmic Ciutadà)으로 발급했고, 이 지역화폐의 승수효과가 유로화에 비해 5배 높았다는 연구가 발표됐다”고 소개했다. 토론자로 나선 문진수 서울신용보증재단 상임이사는 “농촌기본소득과 지역화폐는 둘 다 지역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정책이란 점에서 서로 연계되고, 융합도가 높은 정책”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토론자인 임경수 경기도일자리재단 고용성장본부장은 “지금 농촌은 이미 농사로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많은 농민들이 다른 일을 겸업하고 있다”며 “지역화폐 형태의 농촌기본소득이 지급되면 겸업 일거리 형태의 지역 내 경제활동뿐 아니라, 돈이 되지 않는 지역사회나 자기 자신을 위한 활동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포럼에선 실제 경기도의 농촌기본소득에 접목할 수 있는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정해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가 발제를 맡은 ‘농촌기본소득 효과성 검증을 위한 조사설계 연구 발표'에선 설문조사를 통해 측정할 주요 지표들이 제시됐다. 이 지표들은 개인적 차원의 삶의 질과 지역 경제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 등으로 나뉘며, 구체적으론 개인의 행복, 소비 및 여가활동, 고용 효과, 사회관계망, 지속거주 의향, 공동체 의식, 환경의식 등 13가지다. 이 측정지표에 대해 서정희 군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는 “경기도의 농촌기본소득 사회실험은 지금까지 실험된 범주형 기본소득의 방식을 넘어서 특히 공동체 효과를 볼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제안”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런 의미에 맞는 효과 측정을 주문했다. 일례로 서 교수는 “기본소득으로 확보된 시간만큼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역량이 향상돼 일자리의 질이 좋아질 것이란 기대로 효과를 측정하려 하는데, 공동체 효과가 나오려면 기본소득으로 확보한 시간으로 자기계발이 아닌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해일 교수는 “(농촌기본소득 지급 이후에) 일자리와 소득 활동에 보내는 시간 외에도 여가, 가족과 커뮤니티(지역 공동체)와 보내는 시간 등도 주요 측정지표에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좌장을 맡은 정건화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랩2050 이사장)는 “우리의 경제활동 중에서 임금으로 교환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여러 의미있는 활동들을 표면적으로 나누고 상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활동들을 기본소득과 연계해 지표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또한 정 교수는 “지역순환경제를 통해 지구의 생태적 용량을 넘어서는 경제를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를 더 논의했으면 한다”고도 덧붙였다.
윤형중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philyoon2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