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등록 : 2014.10.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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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최저생계비를 보장하기 위해 생활임금제를 도입하는 지자체가 잇따르고 있다. 2011년 대학 청소노동자 파업 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생활임금 쟁취’가 적힌 풍선을 들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실질적인 최저생계비 보장 
지자체 생활임금제 도입 잇따라
경기 부천 이어 서울 노원·성북…
서울시도 내년부터 시행 예정
최저임금 대비 7~30% 높아

“순대와 떡볶이까지 직접 만들어 가면서 골목 상권을 죽이는 사람들이 회의에 나와서는 ‘최저임금을 높이면 저임금 고용이 필요한 영세 자영업자들만 어려워진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노동계 대표의 푸념이다.

최저임금제는 1988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도입됐다. 1928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최저임금 결정제도의 수립에 관한 협약’을 권고한 지 60년,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35년 만이다. 노동계의 숙원이던 최저임금제는 시행 26년이 지난 지금은 계륵 같은 존재가 됐다. 비현실적인 최저임금 수준 때문이다. 노동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최후의 방어막이 될 것이란 기대와 달리, 외려 국내 기업의 저임금 구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준값이 워낙 낮다 보니 해마다 물가인상률 이상을 올려도 실질적인 최저생계비를 보장하기엔 부족하다. 최저임금 인상률은 김대중 정부 5년 평균 9.02%, 노무현 정부 때는 평균 10.64%에 이르다, 이명박 정부 들어 평균 5.21%로 그나마 후퇴했다.

이런 비현실적인 최저임금의 대안으로 ‘생활임금제’를 도입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잇따르고 있다. 생활임금제는 ‘주거·교육·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임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1994년 미국 볼티모어시가 관련 조례를 제정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2012년 올림픽 관련 종사들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말 경기도 부천시가 ‘노사민정 협의체’를 구성해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관련 조례를 제정했다. 제도화에 앞서 단체장의 행정명령을 통해 가장 먼저 생활임금을 지급한 곳은 서울 성북구다. 성북구는 지난해 1월부터 성북구도시관리공단과 성북문화재단 계약직 근로자 110명을 대상으로 생활임금을 지급했다. 대상은 직접 고용한 정규·비정규 노동자다.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4인 가구 한달 최저생계비가 163만원인데, 1인당 최저임금은 108만원에 불과했다. 조례 제정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행정명령으로 생활임금제를 시행했다”고 말했다. 당시 성북구가 정한 생활임금은 한달에 135만7000원으로, 최저임금(2013년 기준) 기준 급여보다 34만원, 31%가량 높은 것이다. 성북구의 생활임금 기준은 ‘5인 이상 사업장 종사자의 평균 급여의 58%’다. 같은 기준으로 유럽연합(EU)이 책정한 생활임금은 60%다.

지난 8월 성북구의회는 직접 고용 인력뿐 아니라 성북구에 공사·용역·위탁업무 등을 제공하는 업체 소속 근로자들한테도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이들 업체와 계약할 때 인건비 단가를 생활임금 이상으로 결정할 것을 의무화하기로 한 것이다. 성북구에 이어 서울 노원구는 지난 8월 생활임금 지급을 위한 조례안을 통과시켰고, 서대문구는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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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임금 도입에 따른 예산 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광역자치단체들은 시행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경기도는 의회와 단체장 사이의 갈등으로 조례 제정 뒤에도 시행을 못 하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지난해 12월 생활임금 조례를 통과시켰지만 당시 김문수 지사는 “고용 인력에 대한 임금 결정은 지사의 권한”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의회가 재차 생활임금 관련 조례안을 의결하자 김 지사는 임기 마지막 날인 6월30일 법원에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민간업체에 지급의무는 위법” 논란
“비현실적 최저임금 대체 입법 필요”

생활임금이 최저임금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민간으로 확산될 수 있는 여론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가 민간 계약업체에까지 생활임금을 의무화하는 것에 대해 벌써부터 위법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법제처는 “계약 상대방의 이익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특약이나 조건을 정하지 못하게 한 지방계약법에 반하며, 생활임금 지급은 최종적으로 지자체가 부담하는 것이므로 개인에 대한 보조를 금지하는 지방재정법에도 어긋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재원과 의지가 있는 일부 지자체에서만 제도 도입이 이뤄지는 것 또한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다.

민간 확산의 어려움은 좀더 근본적이다. 현재 최저임금 인상에도 난색을 보이는 경영계가 이보다 더 높은 생활임금제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저임금보다 낮은 저임금 고용으로 수익성을 유지하는 수많은 자영업자들에겐 사실상 적용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현행 최저임금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은 “생활임금제의 확산과 정착을 위해선 기존 최저임금제의 틀에서 벗어나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에 근거해 새로운 입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재교 한겨레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jkse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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