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 2012년 발효된 협동조합기본법에서 정의하는 협동조합의 성격과 역할이다(제2조). 경영학에서 말하는 ‘사업’은 모름지기 투자자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인데,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사업체가 어떻게 가능할까? 협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정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져왔다. 1995년 국제협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 ICA)은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를 협동조합의 중요한 원칙으로 선언했다. ‘세계화’, ‘지구촌’ 등의 구호 아래 세계로 미래로 나가자고 외치던 시기에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행복해질 것을 강조했다.
소득 유출 막아 선순환 경제 유도
협동 통해 공동체 관계망 넓히고
생활정치 활성화 기반도 마련더 나은 동네서 자란 저소득층 자녀
성인 돼서 일자리 찾을 확률 9%
소득은 16% 더 높다는 조사 나와지난 3월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미시간대학에서 진행된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했다. 저소득층의 어린이들 중 성장기에 경제·사회·문화적 인프라가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한 어린이들과 이사를 하지 않은 어린이들을 추적·비교한 것이다. 이사를 한 어린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이사를 하지 않은 어린이들에 비해 소득이 16%나 높고 일자리를 찾을 확률도 9%나 높았다. 비단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좋은 동네가 사람들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은 많다. 지난 2011년 <도시문제 연구>(Urban Affairs Review)에 실린 ‘10대 도시에서 행복 추구 이해하기’라는 연구에서는 공동체와 사람들과의 유대감이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행복감을 높이는 주요한 변수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을 통해 ‘더 나은 동네’를 만드는 것은 가능할까?
지난 25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설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250여명의 협동조합 관계자들이 모여 협동조합이 ‘지역사회에 공헌’이라는 목표를 잘 달성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좋은 동네에서 살자: 지역사회의 내일을 만드는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사례 발표와 전문가들의 대담이 이어졌다.
아이쿱협동조합지원센터 정화령 이사는 협동조합이 지역사회에서 기존과는 다른 종류의 ‘부’를 생산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지역 생협 매장은 식품의 가격안정이나 안전한 먹거리 공급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통해 다른 부를 만들어낸다. 지역내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주민들의 활동 공간을 주며 보다 안전한 지역소비환경을 만드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사회 경제 체질을 바꿔낸다.
지역에 생산시설이 있더라도 지역주민을 고용하지 않거나, 벌어들인 돈이 지역에서 유통되지 않고 본사가 있는 서울로 올려 보내지는 경우가 많다. 지역소득의 ‘역외유출’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대형마트와 대규모 프랜차이즈다. 이곳에서 지역주민들이 소비한 돈은 본사가 있는 서울로 흡수되고 집중된다. 지역이 가난한 것은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지역에서 창출된 부가 외부로 유출되어서이다. 일례로 2014년 충남에서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의 총합계인 지역내총생산(GRDP)은 103조7천억원이었다. 하지만 이 중 4분의 1인 26조5천억원이 지역 외부로 유출됐다. 반면 협동조합은 지역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지역주민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방식을 통해 생산해낸다. 지역주민의 소비가 지역 바깥으로 흘러가지 않고 지역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선순환 경제를 만들어낸다. 더 나아가 지역사회를 위한 적극적인 재투자를 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 기획재정부에서 발간한 ‘2015년 협동조합 실태조사’를 보면 최근 설립된 협동조합 2257개 중 절반에 해당하는 49.4%(1115개)가 지역주민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생산물품을 기부하는 등의 방식으로 지역사회 재투자를 했다. 2014년 한해 동안 이들 조합은 3만1118회 지역사회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들의 활동을 환산한 금액은 90억7795만원에 달했다.
지역 주민들 사이의 유대감 형성 등 사회적 관계 형성에는 어떤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은 사업체인 동시에 조합원들의 모임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라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대표나 최고경영자(CEO)가 사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지속적으로 만나고 소식지, 문자, 회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결정한다. 조합원들로부터 시작된 관계는 조합을 넘어서 지역사회의 다양한 곳으로 확장된다. 황지애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은 대구행복·포항아이쿱생협 사례 연구를 통해 “협동조합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지역 안에서 관계망이 확장”되는 과정을 소개했다. 협동이 또 다른 협동을 낳으며 지역주민들은 연쇄적인 협동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활협동조합의 경우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 유통이라는 목표에서 시작하지만 학습의 욕구, 안전 및 환경보호의 욕구, 지역활동 참여 욕구 등으로 확대된다. 지역사회 공통의 욕구를 발견하고 관계를 형성한 경험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확산된다. 개인으로 분절되었던 이들이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묶이게 되고, 지역사회 안에 그물망과 같은 다양한 관계들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아이쿱생협의 경우 2015년 기준 전국 85개의 지역조합에서 2026건의 모임이 열렸고 모두 1만1216명이 참여했다.
관계와 모임의 경험은 더 나아가 생활정치의 기반이 된다. 헌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루소의 말처럼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반해 생활정치는 나와 너의 일상을 위협하는 일들에 함께 목소리를 높이며,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자는 움직임이다. 심포지엄에서는 생활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진주아이쿱생협 사례가 소개됐다. 조합원들은 진주의료원 폐쇄 반대 행동이나 무상급식 유지를 위한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부터 시의회모니터링단을 조직했다. 예산분석에 관한 교육과 모니터링을 진행하며 매년 <생활정치 사업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2015년 4월에는 진주시민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단디뉴스’(dandinews.com) 창간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진주아이쿱생협을 포함해 지역사회의 시민단체, 개인 등 100여명이 매달 후원금을 낸 금액으로 지역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뉴스가 만들어지고 있다.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는 협동조합도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더 좋은 정책이 만들어지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킨다는 원칙이 모든 공공정책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니라며 “지역사회의 협동조합이 적극적으로 공공정책을 견인하는 동시에 지자체 또는 공공부문이 운영하는 시설과 공공서비스를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협동조합’(co-operatives build a better world). 2012년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의 주제다. 더 나은 세상은 나와 내 주변의 일상의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협동조합은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촉매제와 같다. 협동조합을 만들었다고 자연스레 우리 지역이 더 좋은 세상이 되지는 않지만,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경제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김형미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장은 “자치와 협동의 조합원 활동은 지역사회를 더 좋게 만드는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 COP)로서 협동조합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역량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수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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