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정부, 내년도 예산 8조6천억 편성
‘삶의 표준’ 담은 중장기 추진계획 준비
“새로운 망이 깔리는 것과도 같아”
“공공이 인내심 가지고 기다려줘야”
서울 은평구 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찾은 청소년들이 큰 골목길(광장)에서 독서기록장을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서울 은평구 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찾은 청소년들이 큰 골목길(광장)에서 독서기록장을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의 알링턴 카운티. ‘노스퀸’이라 이름 붙은 구도심엔 지은 지 족히 100년도 넘은 낡은 영구임대주택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네에 둥지를 튼 저소득 세입자들에게 리모델링 비용은 좀체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당국은 묘책을 찾아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옛 건물들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구도심 재개발 용적률을 상향조정했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해 자금도 지원했다. 건축 비용 700만달러는 30년 상환 조건으로 장기대출도 해줬다. 대신 사업시행자는 인근 상가와 업무용 빌딩을 재개발해 얻은 수익으로 임대아파트 리모델링을 맡았다. 혜택은 고스란히 세입자들 몫으로 돌아갔다. 소득분위 60% 이하 입주민한테는 임대료(월 3천달러)를 3분의 1 수준인 1천달러로 깎아줬다. 쇠퇴한 도시를 되살려낸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다.

일상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전북 완주 비비정마을이 대표적이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읍에서 가장 가난했던 마을은 이제 로컬푸드 농가 레스토랑과 카페, 공연장 등이 한데 어우러져 전국에서 연간 15만명이 찾는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28억원을 들여 근대 문화유산을 활용한 생활문화 공간으로 변신시킨 덕이다. 공공영역(공간 조성 및 교육)과 사회적경제(초기 사업구조화), 지역 비영리조직(운영)의 3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 밖에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시작돼 주민들이 꾸린 사회적협동조합이 위탁운영까지 맡은 서울 구산동 도서관마을, 동네의 풍경을 바꿔놓은 서울 방학3동 마을활력소 ‘은행나루’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왼쪽부터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 김이탁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기획단장, 전은호 나눔과 미래 시민자산화사업팀장, 배미원 성남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박환용 한국주거복지포럼 상임대표, 김용수 국무조정실 생활에스오시추진단 부단장, 권준욱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국장, 정보연 행정안전부 주민자치형공공서비스추진단장, 이주원 국토교통부 장관정책보좌관, 조경민 서울산책 대표.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1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왼쪽부터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 김이탁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기획단장, 전은호 나눔과 미래 시민자산화사업팀장, 배미원 성남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박환용 한국주거복지포럼 상임대표, 김용수 국무조정실 생활에스오시추진단 부단장, 권준욱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국장, 정보연 행정안전부 주민자치형공공서비스추진단장, 이주원 국토교통부 장관정책보좌관, 조경민 서울산책 대표.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3세대 에스오시 시대’가 열린다

나라 안팎에서 진행된 이런 흥미로운 사례들은 모두 지역밀착형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정책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묶일 만하다. 지역 주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될뿐더러 지역사회의 온갖 역량이 결합돼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이 공통분모다. 문재인 정부도 부쩍 힘을 보태고 있다. 내년도 생활에스오시 관련 예산은 올해(5조8천억원)보다 48%나 늘어난 8조6천억원으로 편성됐다. 지난달엔 국무총리실 산하에 ‘생활에스오시 관계부처 합동추진단’도 꾸렸다. 사업에 힘을 실어주려 인원과 조직을 더욱 늘릴 예정이다. 경제개발 시기 철도와 도로를 닦아 전국을 지리적으로 연결한 토목 중심의 1세대, 정보화 고속도로를 놓아 가상공간 연결에 방점을 찍은 2세대를 지나, 사회적 공간을 연결해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공동체를 형성하는 3세대 에스오시 시대를 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지난 1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 정책의 쟁점과 과제’ 토론회는 문재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생활에스오시 정책의 현주소를 중간점검해보는 소중한 자리였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국토교통부,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가 공동주관한 이날 행사엔 중앙정부와 기초자치단체, 사회적경제 분야 활동가 등 150여명이 참석해 4시간 가까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전국의 기초단체 10여곳 대표가 끝까지 자리를 함께해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지난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김영배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이 기조강연에서 ‘정부의 생활에스오시 정책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지난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김영배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이 기조강연에서 ‘정부의 생활에스오시 정책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이날 특별강연을 맡은 김영배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은 “현 정부의 생활에스오시 정책은 물리적 투자에 방점을 둔 정책에서 삶의 질과 터전을 만들어가는 투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뜻한다”며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시민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 삶의 표준을 담은 중장기 추진계획을 내년 3월까지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는 지역별 생활에스오시 공급현황 및 적정 공급수준을 분석해 ‘국가 최소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쾌적하고 살기 좋은 생활을 누리기 위한 조건을 담은 ‘최소 주거기준’과 마찬가지로, 기초생활 인프라에 관한 국가기준을 재정비하겠다는 뜻이다. 지역 거점시설을 예로 들자면, 공공체육시설은 차량 25분, 공공문화시설은 차량 20분 식으로 조건을 명시하겠다는 얘기다. 마을 단위시설의 경우 마을주차장(도보 10분), 어린이집(도보 5분) 등 항목별로 구체적 조건이 정해져 있다. 김이탁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기획단장은 “문재인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 공약은 단순 주거정비사업이 아니라 쇠퇴한 도시를 재활성화해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는 도시혁신사업”이라며 “사회적경제 영역이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김이탁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기획단장이 ‘생활에스오시의 촉진동력으로 도시재생뉴딜’을 주제로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정책을 소개하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지난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김이탁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기획단장이 ‘생활에스오시의 촉진동력으로 도시재생뉴딜’을 주제로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정책을 소개하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 “공공이 인내심 가지고 기다려줘야”

생활에스오시를 바라보는 관점의 근본적 변화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예컨대 ‘제주에서 한달 살기’ 같은 새로운 흐름은 지역공동체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조정민 서울산책 대표는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마을공동체와 가족공동체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를 느슨한 형태의 ‘취향공동체’가 꿰차고 있다”고 진단한 뒤 “생활에스오시도 전통적인 원주민을 넘어서 생활경제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상의 삶에 깊숙이 녹아든 생활에스오시는 그 자체가 중요한 플랫폼으로도 손색없다.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는 “생활에스오시란 정책실험과 비즈니스실험이 가능한 하나의 망이 한국 사회에 새로 깔리는 것과 같다”며 “정부의 초기 예산은 마중물로, 앞으로 더 큰 승수효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건강과 복지의 관점에서, “예를 들어 자동 심장충격기나 고압산소 치료기처럼 ‘생명 에스오시’ 쪽으로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권준욱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국장의 지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역 현장의 분위기는 기대와 우려가 뒤섞여 있다. 서울 서대문구는 생활에스오시 선도사업의 하나로 홍제권역 지하도시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 중이다. 홍제1·2·3동과 홍은1·2동 일대는 하루 약 4만명의 유동인구가 몰리는 곳이다. 서대문구 생활에스오시 사업 현황을 소개한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은 “홍제역 인근을 문화시설과 보건소 등 문화복합시설을 갖춘 지하도시로 개발할 계획”이라며 “주민이 모이는 거점공간이자 누구나 누리는 생활에스오시의 생생한 현장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민생활 SOC 현장방문, 동네건축 현장을 가다' 행사에서 도서관을 둘러 보고 있다. 2018.09.04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민생활 SOC 현장방문, 동네건축 현장을 가다' 행사에서 도서관을 둘러 보고 있다. 2018.09.04 청와대사진기자단
한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행정 편의에 따라 배치된 ‘1구 1관’ 체계가 거주지 중심의 공공서비스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현실에서 자주 발견된다. 공공시설 재배치 작업이 필요한 배경이다. 서울 중구가 대표적이다. 도서관, 문화시설, 경로당 등 관내 대부분의 공공시설에서 주민 이용률이 낮고 공간 활용도도 떨어지는 문제점이 발견됐다.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은 “정부의 생활에스오시 투자가 지자체의 공공시설 재배치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며 “이와 함께 단순한 시설 지원을 넘어 관리운영에 대한 지원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에 대한 주문도 이어졌다. 전은호 나눔과미래 시민자산화사업 팀장은 “지역의 자산 운영 역량이 커질 때까지 공공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배미원 성남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도 “일선 기초자치단체 현장에선 정작 생활에스오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라며 “기초단체를 처음부터 논의 틀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가 ‘생활에스오시와 사회적경제의 연계 방안 모색’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지난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지역밀착형 생활에스오시(SOC)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가 ‘생활에스오시와 사회적경제의 연계 방안 모색’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 “7천억원 규모 주민 제안 받을 예정”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는 있으나, 성공을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당장 내년도 예산만 뜯어봐도 기존 에스오시 사업과의 차별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이미 확정된 사업이 대부분이다. 성패는 문재인 정부 임기 후반부에 접어드는 2020년 이후에야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정보연 행정안전부 주민자치형공공서비스추진단장은 “사업추진 확정이 늦어진 탓에 엄밀히 말해 내년 예산은 양적 확대에 그친 편”이라며 “2020년 사업을 위해 20억원씩 총 7천억원 규모의 주민 제안 에스오시 사업 신청을 내년에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예산 편성 등 행정 일정을 고려하면 늦어도 내년 4월 이전에 주민 제안이 이뤄져야 2020년 예산에 반영될 길이 열린다.

무엇보다 작더라도 소중한 성공 사례를 꾸준히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생활에스오시 사업을 맡은 김용수 국무조정실 생활에스오시추진단 부단장은 “생활에스오시 사업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것”이라며 “국민들이 예측할 수 있도록 지역별 사정과 상황을 두루 감안해 어떤 시설을 어떤 기준으로 어떤 일정에 따라 공급할지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

▶ 지역밀착형 '생활SOC' 정책의 쟁점과 과제 토론회 자료집 https://goo.gl/CToH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