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짬] 콜로라도대 댄버캠퍼스 토니 로빈슨 교수
3년 전 600년 된 억새풀 무덤에 감동
동아시아 역사적 인물로 이성계 주목
배우자 지민선씨의 조사·번역이 큰 힘
강화도 무대로 한 한국사 후속작 준비

로빈슨(오른쪽) 교수가 지난 2일 아내 지민선씨와 함께 자택 서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민선씨 제공
로빈슨(오른쪽) 교수가 지난 2일 아내 지민선씨와 함께 자택 서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민선씨 제공

이 땅에 살지만, 동구릉이 낯선 사람도 적지 않다. 동쪽 아홉 개 무덤을 뜻하는 동구릉은 경기 중부 구리시에 위치한다. 무덤 가운데 하나는 이름이 더 생소한 건원릉이다. 무덤의 주인은? 한국 사람 모두가 아는 이성계다.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북부간선도로 왼편에 있는 615년 된 이 릉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태평양 건너 미국 중부에 있는 콜로라도대학교 덴버캠퍼스의 토니 로빈슨 교수에게 건원릉은 각별하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3년 전 그는 태조의 무덤을 찾았다. 맑고 푸른 빛이 도는 가을 하늘과 대비돼 무덤을 덮은 은빛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강렬했다. 잘 가꾸어진 짧은 초록색 잔디가 깔린 고분들과는 다른 정취를 뿜어냈다. 그때 앙상블 레이어스 클래식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연주했다.

그날의 감동이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를 다룬 책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이미 이성계란 인물을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이 알았지만 이날 이 독특한 무덤의 주인공을 더 깊게 알고 싶어졌다. 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 결과물은 3년이 채 안 된 지난달 507쪽에 이르는 책  〈 A Flying Dragon: King Taejo, Founder of Korea’s Choson Dynasty〉 (하늘을 나는 용: 한국의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임금·표지)으로 나왔다. 제목은 태조의 손자 세종이 이성계를 비롯한 조상의 업적을 기린 <용비어천가>에서 따왔다. 참고 문헌만 26쪽에 이르는 이 책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쓰였다. 이성계를 다룬 최초의 영어 전기인 셈이다. 방대한 관련 한국어 자료들을 찾고 번역해준 그의 한국인 부인 지민선씨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작업이었다.

짧은 시간에 나온 듯 보이지만 책은 숙성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부는 지난 12년 동안 매해 여름 콜로라도대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정치학과 여름 강좌로 개설한 ‘한국이 세계로 가다: 전통과 현대, 서울과 부산까지’란 프로그램 활동이었다. 미국 학생들을 데리고 방방곡곡을 누볐다. 조선 건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주를 시작으로 서울 지역 궁궐과 종묘, 왕릉 방문 등 지금의 한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중점을 두고 운영했다. 전주 오목대에 이어 어진 박물관에 들러 이성계 초상화 앞에서 로빈슨이 침을 튀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귀를 쫑긋 세운 채 듣던 학생들은 ‘이성계의 혼이 씌운 게 아니냐’며 감탄사를 쏟아내곤 했다. 그때마다 학생들은 “교수님, 이 이야기를 영어로 쓰셔야 할 거 같아요. 너무 흥미진진해요”라고 부추겼다. 해를 거듭할수록 부부의 지식도 깊어졌고 유럽의 중세사처럼 한국사를 더 알고 싶어하는 영어권 청중이 있다는 확신도 커졌다.

이는 책을 펴내는 동기이자 힘이 되었다. 로빈슨 교수와 민선씨는 이달 초 <한겨레>와 몇 차례 이메일과 메신저를 주고받으면서 “앞뒤 천 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던 이성계 일대기에는 치열한 왕권 다툼과 대담한 군사적 사건, 극심한 이념 충돌 그리고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한 가문의 형제간 살인과 비극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을 넘어서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성계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견줘 제대로 된 영어 전기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로빈슨 부부는 안식년을 계기로 2020~2021년에 15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집필에 몰두했다. 로빈슨에게 이성계는 한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가 이 버스에 올라탄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것”이었다. 로빈슨은 민선씨와 결혼한 지 25년이 됐다. 그는 아내의 고향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자녀가 생긴 뒤 그 열망은 더 커졌다. 부부가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함께 또 깊게 하는 것이 “가족의 다국적 정체성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에 갓을 쓴 로빈슨(오른쪽) 교수가 아내 지민선씨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민선씨 제공
머리에 갓을 쓴 로빈슨(오른쪽) 교수가 아내 지민선씨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민선씨 제공

로빈슨과 민선씨는 지난해에도 한국 관련 책을 한권 펴냈다. 〈 Sustainable, Smart and Solidary Seoul 〉(지속 가능하고 스마트하며 연대하는 서울)이란 제목의 이 책도 두 사람의 지적 관심과 한국이란 접점에서 나왔다. 책은 유엔(UN)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시리즈의 일환이다. 두 사람은 가족 공동체를 넘어 학문 공동체처럼 보인다. 많은 책과 논문, 보고서를 공저했다. 로빈슨과 함께 콜로라도대에 근무했던 민선씨는 지난해 대학을 나와 로키 마운틴 종업원지주제센터(RMEOC)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민선씨는 사회적 경제에 관심이 많다.

책은 미국에 사는 부부가 그것도 영어로 쓴 한국 역사서란 점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로빈슨의 전공은 역사나 지역학이 아닌 정치학이다. 미국 정치제도와 선거, 정치사상 등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도시, 커뮤니티, 이민자, 빈곤, 노숙자, 풀뿌리 운동 등 연구 및 활동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세상을 바꿔내기 위한 실천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와 경로는 두 사람이 꼭 닮았다.

이성계를 다룬 책은 전문적이지만 동시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대중서다. 로빈슨은 궁중 사가에 의해 기록된 실록 등에 기반을 둔 이 책이 “이성계의 생애와 업적에 대체로 우호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책 곳곳에서 특히 서문에서 실록 등 사료가 갖는 태조 편향성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책은 독일의 한 출판사를 통해서 출간됐으며 인터넷(https://hasp.ub.uni-heidelberg.de/catalog/book/1158)을 통해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부부는 한국사 작업의 후속작으로 유배와 처형, 격전이 있었던 강화도를 무대로 한 책도 준비 중이다. 이 밖에도 한국 관련 두 권의 책을 더 계획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길 바라지만 비록 극소수의 비한국인들이 읽을지라도 이 특별한 작업을 맡아 우리 가족과 공동체에 지속적인 뭔가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 로빈슨 제공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10947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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