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사회]
새해 기획 | 균형발전, 도시혁신이 답이다
- ③ ‘섬유 도시의 재탄생’ 구라시키
버선·학생복 등 섬유산업 중심지 역할
최초 ‘메이드 인 재팬 청바지’ 생산도

‘청바지 거리’ 등 도시 혁신의 자극제
생산·가공·염색 등 연관 분야 살아나
연간 500만명 찾는 관광도시로 성장

고지마 청바지 거리 상점 한구석에는 봉제도 하고, 나만의 청바지를 만들 수 있는 체험 공간도 준비되어 있다. 동양인의 체형에 맞는 청바지를 개발한 ‘빅존’ 상점 내부 모습.
고지마 청바지 거리 상점 한구석에는 봉제도 하고, 나만의 청바지를 만들 수 있는 체험 공간도 준비되어 있다. 동양인의 체형에 맞는 청바지를 개발한 ‘빅존’ 상점 내부 모습.

오사카에서 서쪽으로 약 180㎞ 떨어진 도시 구라시키. 일본 열도의 중심을 이루는 혼슈 섬 서부 오카야마현에 속한 인구 48만명의 아담한 도시다. 지난 12월18일 찾아간 도시 남쪽의 고지마 지역에선 마치 빨래처럼 나란히 줄에 걸린 청바지들이 방문객에게 인사라도 건네듯 바람에 연신 흔들거리고 있었다. 점포 40여곳이 줄지어 늘어선 이른바 ‘청바지 거리’엔 젊은 상인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청바지 마을’ 고지마 한복판의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마을과 도시가 점차 활력을 잃고 죽어가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 마을을 되살리기 위한 일을 해보자며 기존 상인들을 차례차례 설득해 나간 게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이날 청바지 거리에서 만난 마나베 히사오는 청바지 마을이 걸어온 길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청바지의 매력에 뒤늦게 눈떠 12년 동안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재팬 블루’라는 청바지 생산 업체를 차린 그는 청바지 거리를 자신이 나고 자란 구라시키 혁신의 상징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가 앞장서 ‘고지마 청바지 거리 추진협의회’를 만든 게 2009년. 10년 사이 이곳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고지마 마을 곳곳에서 청바지가 마치 빨래처럼 걸려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고지마 마을 곳곳에서 청바지가 마치 빨래처럼 걸려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지역사회 전체가 청바지 ‘띄우기’ 나서

고지마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만난 스에사 도시하루 경영지원과 주임이 던진 한마디는 지난 10년 세월을 압축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청바지를 디딤돌 삼아 다른 산업도 살리고 도시 활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움직였다.” 빈말만은 아니었다. 지역사회 전체가 ‘청바지 띄우기’에 힘을 모았다. 구라시키 시의회는 점포마다 100만엔(약 1000만원)의 개조 비용을 지원했고, 주변엔 청바지 색깔 아이스크림과 빵, 청바지로 포장한 원두 등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가게들이 잇달아 들어섰다. 청바지를 제작해 판매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일대엔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필 왜 청바지였을까?

‘청바지의 성지’. 구라시키 이름 앞에 자연스레 따라붙는 수식어 속엔 이 도시의 굴곡 많은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의 바다에 맞닿은 구라시키엔 20세기 중반 이후 정유산업과 화학 분야의 덩치 큰 기업들이 잇달아 둥지를 틀었다. 현대적 도시의 모양새를 차츰 갖추기 시작한 것. 하지만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을뿐더러 도시 이름을 널리 알린 건 바로 섬유산업이었다. 시작은 6000㎢ 넓이의 바다가 간척지로 탈바꿈한 17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지마 지역은 이때 육지와 연결된 간척지의 중심이다. 바닷물을 머금어 염분이 강한 토양은 쌀농사 대신 면화 재배에 유리했고, 이는 곧 일찌감치 섬유 도시로 자리 잡는 자양분이 됐다.

청바지 마을에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청색 아이스크림과 빵도 즐길 수 있다. 오일환 오카야마 한국교육원장 제공
청바지 마을에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청색 아이스크림과 빵도 즐길 수 있다. 오일환 오카야마 한국교육원장 제공

‘최대 버선 생산지’에서 ‘최대 학생복 생산지’로…. 도시는 변신을 거듭했고 화려한 시절은 이어졌다. 100년 전인 1919년, 버선 생산이 연간 2000만 켤레를 정점으로 뒷걸음쳤을 땐 기존 생산시설을 재빨리 학생복과 작업복 생산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한때 일본 전역의 학생복 70%, 작업복 30%가 이 도시에서 생산됐다. 하지만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일본 사회가 저출산 사회로 들어서면서 1980년대 후반 1100만명에 이르던 중고생 수가 90년대 이후 줄어들기 시작해서다. 고지마 지역 일대에 몰려 있던 의류 생산 업체는 속속 문을 닫았고, 거리는 어느새 빈 점포가 늘어선 ‘셔터 거리’(상점과 사무실이 폐점하면서 쇠퇴한 거리)로 변해버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인적도 거의 끊겼다. 섬유산업에 뿌리를 둔 도시 경제는 직격탄을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바지 원단으로 만들어진 고지마 버스 내부 모습. 오카야마현 현청 페이스북 갈무리
청바지 원단으로 만들어진 고지마 버스 내부 모습. 오카야마현 현청 페이스북 갈무리

섬유산업 종사자 비중 15%

미국 문화의 상징인 청바지가 고지마 지역경제 활성화의 열쇳말로 등장한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섬유산업이 유독 발전한 지역답게 미군 방출품의 형태로 패전국 일본에 소개된 청바지가 처음 현지 생산된 곳이 바로 구라시키다. 말하자면 일본 입장에선 ‘청바지의 고향’인 셈이다. 1962년 일본 최초로 여성용 청바지를 생산한 베티 스미스가 둥지를 튼 곳도, 미국 의류업체 캔턴의 위탁을 받아 청바지를 주문생산하던 ‘빅존’이 1973년 동양인의 체형에 맞는 청바지 개발을 목표로 내걸고 순수 기술로 ‘메이드 인 재팬’ 청바지의 씨앗을 뿌린 곳도 구라시키다. 이런 전통을 되살려 섬유산업을 다시 일으키고 도시 혁신의 자극제로 삼자는 얘기였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면 고지마 청바지 거리도, 미관지구도 없었을 것이다. 구라시키 마을 살리기의 두 주역인 오가 기미코 미관지구 주민협의회장(왼쪽)과 마나베 히사오 ‘재팬 블루’ 청바지 회사 사장.
주민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면 고지마 청바지 거리도, 미관지구도 없었을 것이다. 구라시키 마을 살리기의 두 주역인 오가 기미코 미관지구 주민협의회장(왼쪽)과 마나베 히사오 ‘재팬 블루’ 청바지 회사 사장.

다행히도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청바지 거리 프로젝트가 화제를 모으면서 단순 판매를 넘어 생산·가공·방적·염색·봉제 등 예전부터 도시에 흔적을 남겼던 연관 섬유산업 전반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 현재 구라시키 섬유산업의 연간 출하액 규모는 우리 돈으로 약 1조3000억원 남짓. 도시 규모에 견주면 절대 적지 않은 수치다. 1990년 48.5%이던 의류 수입 의존율이 2015년 97%로 늘어날 정도로 일본 전체로선 의류산업의 비중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데도 구라시키의 섬유산업 기반은 아직 튼튼한 편이다. 게다가 디자인·첨단 세척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의 비중이 커지는 것도 기대 이상의 효과다. 2018년 기준 구라시키 제조업 사업체 1649곳 가운데 섬유산업 사업체는 504곳. 섬유산업 종사자 비중도 전체 노동자의 15%대로, 수송용 기계 제조 다음으로 높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의 모습. 가운데 구라시키강을 따라 버드나무와 창고 건물이 늘어서 있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의 모습. 가운데 구라시키강을 따라 버드나무와 창고 건물이 늘어서 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에 힘입어 도시 재생에 탄력이 붙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구라시키 곳곳엔 옛 에도 시대의 전통을 간직한 유물이 적지 않다. 시 당국은 국비 지원과 지역 상호신용금고 등을 통한 무보증·저리 대출을 통해 옛 건물과 창고 등을 보전하는 데 힘을 쏟는 중이다. 적정 임대료를 설정해 상인들이 권리금 부담 없이 입주하도록 돕는 것도 청바지 거리 프로젝트의 성공이 안겨준 선물이다.

고지마에서 처음 시작된 ‘스톤워싱’ 세탁 가공 기술. 하얀색 돌과 함께 세탁하면 우리가 흔히 입는 빈티지 청바지가 연출된다.
고지마에서 처음 시작된 ‘스톤워싱’ 세탁 가공 기술. 하얀색 돌과 함께 세탁하면 우리가 흔히 입는 빈티지 청바지가 연출된다.

아베, ‘지역 창생’의 대표 사례로 소개

청바지가 불러온 작은 날갯짓은 이제 섬유산업의 울타리를 넘어 관광 등 다른 산업으로 널리 퍼져가는 중이다. 실제로 구라시키엔 고지마 지역 이외에도 옛 면방직 산업의 흔적을 관광 상품으로 탈바꿈시킨 전례가 이미 있다. 고지마 지역에서 북쪽으로 약 18㎞ 떨어진 ‘미관지구’가 주인공. ‘창고가 많은 곳’이란 뜻에서 이곳이 과거 상업의 중심지였음을 짐작게 한다. 주변 지역에서 보내는 조공과 물자를 보관하던 이곳은 수운업 쇠퇴로 도시 기능을 잃은 채 버려졌다가 19세기 들어 면방직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시 당국과 지역 주민들은 1945년 생산을 멈춘 오하라 방직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탄생시킨 것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전·재생하는 데 힘을 써왔다. 여러모로 고지마 지역의 ‘미래’라 할 만하다. 현재 고지마 지역의 베티 스미스 박물관과 봉제 공장에선 청바지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상품을 제공한다. 구라시키를 찾는 연간 방문객이 500만명을 웃도는 사실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섬유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쟁력을 엿볼 수 있다.

미관지구 주민들에게 보존의 가치를 전한 오하라 마구사부로의 방직공장. 숙박, 전시, 행사 등이 가능한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했다.
미관지구 주민들에게 보존의 가치를 전한 오하라 마구사부로의 방직공장. 숙박, 전시, 행사 등이 가능한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했다.

구라시키가 포함된 오카야마현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고지마 지역에서 불씨를 지핀 구라시키 도시 혁신의 의미는 적지 않다. 오카야마현의 경제력은 일본 전역의 47개 광역단체 가운데 대략 20위권. 이렇다 할 최첨단 산업 기반을 갖추지 못한 지역 단위 작은 실험의 성공 사례가 중요한 이유다. 2017년 1월 새해 첫 시정연설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구라시키 고지마 사례를 콕 집어 ‘지방 창생’(지역 살리기) 정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소개한 건 아마도 단순한 섬유 생산 도시에서 섬유라는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복합문화관광 도시로 발걸음을 내딛는 구라시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 게 아닐까.

구라시키/글·사진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250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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