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사회]
최상위 400명 세율 23%, 평균보다 낮아
미국 조세제도의 ‘역진성’ 한계 뚜렷
사에즈 등 주류 경제학자들 최신 연구
“자산세가 불평등 해법” 주장 뒷받침
유럽은 ‘폐지’, 공정성 저해 등 반론도
‘국내외 자산 모두 부과’ 등 보완책 필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마뉘엘 사에즈와 가브리엘 주크만이 운영하는 인터랙티브 웹사이트 ‘지금, 조세정의’는 세율 조정이나 세목 신설 등 조세제도를 개편할 경우 소득 계층별 실효세율과 불평등 구조에 나타날 변화를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현행 조세제도에 따른 계층별 실효세율(빨간색 선)과 엘리자베스 워런 연방상원의원의 자산세 안에 따른 실효세율(파란색 선)을 비교해 보면, 상위 3% 근방에서 두 그래프가 교차함을 알 수 있다. 상위 3%의 세 부담은 지금보다 늘어나지만 나머지 97%의 부담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지금, 조세정의’ 누리집 갈무리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마뉘엘 사에즈와 가브리엘 주크만이 운영하는 인터랙티브 웹사이트 ‘지금, 조세정의’는 세율 조정이나 세목 신설 등 조세제도를 개편할 경우 소득 계층별 실효세율과 불평등 구조에 나타날 변화를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현행 조세제도에 따른 계층별 실효세율(빨간색 선)과 엘리자베스 워런 연방상원의원의 자산세 안에 따른 실효세율(파란색 선)을 비교해 보면, 상위 3% 근방에서 두 그래프가 교차함을 알 수 있다. 상위 3%의 세 부담은 지금보다 늘어나지만 나머지 97%의 부담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지금, 조세정의’ 누리집 갈무리

‘지금, 조세정의’.

최근 온라인상에 문을 연 한 화제의 사이트(taxjusticenow.org/#/)에 접속하면 큼지막한 미국 의사당 건물 사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사진 옆엔 ‘억만장자들은 한 세기 만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비서보다도 세금을 더 적게 낸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오픈소스 방식의 인터랙티브 웹사이트인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빠져든다.


우선 정부 단위(연방·주·지역)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세목(개인소득세·급여세·소비세 등)을 고려했을 때, 현재 소득 계층별(100분위)로 세전 소득에 견줘 얼마만큼의 세금을 부담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실효세율 현황이 한눈에 드러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세율 조정이나 세목 신설 등 조세제도를 개편할 경우 소득 계층별 실효세율과 불평등 구조에 나타날 변화를 사이트 방문자들이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에 참여하듯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각효과를 극대화하는 그래프를 통해 현재의 수치와 곧장 비교할 수 있는 건 물론이다. 이뿐 아니다. 정확히 1년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후보자들이 내건 조세제도 개편 공약의 기대효과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현행 조세제도 개편을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길잡이가 되는 셈이다.

오픈소스 방식의 인터랙티브 웹사이트인 ‘지금, 조세정의’ 초기 화면. ‘지금, 조세정의’ 누리집 갈무리
오픈소스 방식의 인터랙티브 웹사이트인 ‘지금, 조세정의’ 초기 화면. ‘지금, 조세정의’ 누리집 갈무리

미국 조세제도 비판한 <불의의 승리>


의욕적으로 ‘지금, 조세정의’를 운영하는 주인공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경제학과에 나란히 몸담은 두 경제학자 에마뉘엘 사에즈와 가브리엘 주크만. 화제작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와 함께 <세계 불평등 보고서> 공동집필에 참여해온 두 사람은 최근 몇년 사이 불평등과 조세개혁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쌓은 소장 경제학자들이다. 특히 사에즈 교수는 지난 2009년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40살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한 바 있다. 피케티 교수도 최근 들어 “‘지금, 조세정의’ 사이트를 방문해달라”는 트위트를 계속 날리며 두 사람의 연구 성과를 알리는 데 힘을 쏟는 중이다. 인터랙티브 웹사이트 실험은 지난달 출판된 두 사람의 최신작 <불의의 승리>(The Triumph of Injustice)와 짝을 이루는 작업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어떻게 세금을 회피하고 있나,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게 세금을 물릴까’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현행 조세제도의 명확한 한계와 이를 극복할 구체적 대안이 잘 담겨 있다.

에마뉘엘 사에즈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에마뉘엘 사에즈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대선을 1년 앞둔 미국에선 누진성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현행 조세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눈여겨볼 대목은 단지 유력 정치인들이 내뱉는 정치적 구호를 넘어 주류 경제학자들의 구체적 연구와 분석작업이 이런 목소리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개인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세보다는 누진적 자산세 도입에 좀 더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사에즈와 주크만 교수 두 사람은 그 가운데서도 맨 앞에 선 인물로 꼽힌다. 지난달 17일엔 워싱턴디시(DC)에 근거를 둔 정책연구기관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주최로 ‘불평등과 맞서 싸우기’란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조직하고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 등이 참여한 이날 토론회에서 사에즈 교수는 누진적 자산세 도입이 날로 확대되는 불평등을 줄일 해법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최상위 0.1% 자산, GDP의 60% 넘어


미국 사회의 불평등, 특히 자산 불평등은 이미 임계치에 이른 상태다. 1980년대만 해도 미국의 총 가계자산 규모는 국민소득의 3배였으나, 지난해엔 5배를 넘어섰다. 자본 축적보다는 자산가격 급등의 영향이 훨씬 컸다. 물론 그 열매는 일부에게만 집중됐다. 전체 총자산에서 최상위 0.1% 계층이 소유한 총자산의 비중은 1980년대까지 10%를 밑돌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거의 20%에 이른다.


문제는 사정이 이런데도 전반적인 조세 형평성은 되레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개인소득세와 급여세, 소비세 등 개인이 정부(연방·주·지역)에 내는 세금은 평균적으로 세전 소득의 28% 정도다. 개별 노동자가 의무적으로 물어야 하는 인두세 성격의 민간보험료도 포함한 수치다. 중간소득 계층의 부담액은 소득의 약 40%에 이른다. 하지만 최상위 계층이라 할 상위 400명의 실효세율은 외려 23%로, 중간소득 계층은 물론 전체 평균 실효세율보다도 낮다. 한눈에 봐도 형평성이 크게 훼손돼 불공정 논란에 휩싸일 만하다. 사에즈와 주크만 등 여러 경제학자가 한목소리로 최상위 계층의 조세 역진성이 미국 조세제도의 근본적 결함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가브리엘 주크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가브리엘 주크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에즈와 주크만 교수는 해법으로 누진적 자산세를 첫손에 꼽는다. 자산세란 금융자산과 비금융자산을 가리지 않고 가구(개인)가 보유한 순자산에 대해 누진적 한계세율을 적용해 세금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산세는 누진적 성격이 특히 강한 편이다. 순자산이 소득보다 소유 집중도가 더 높아서다. 부동산에만 세금을 물리는 재산세보다도 누진효과는 더 크다. 2019년 현재 미국의 최상위 0.1% 계층이 쥐고 있는 총자산 추정치는 국내총생산(GDP)의 60%를 훌쩍 웃도는 약 12조달러. 한계세율 1%만 적용하더라도 1200억달러만큼 세수가 손쉽게 늘어난다는 얘기다.


OECD 회권국 중 세 나라만 자산세 시행 중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두 유력 주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뉴욕)과 버니 샌더스(버몬트) 두 사람은 저마다 누진적 자산세 도입안을 일찌감치 발표한 상태다. 워런의 경우, 순자산 5천만달러 이상은 2%, 10억달러 이상은 3%의 한계세율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순자산 20억달러를 보유한 개인은 9억5천만달러의 2%(1900만달러)와 10억달러의 3%(3천만달러)를 더해 4900만달러를 세금으로 내는 식이다. 샌더스의 안은 1%(3200만달러 이상), 2%(5천만달러 이상), 5%(10억달러 이상), 8%(100억달러 이상) 등 한계세율 적용 구간을 좀 더 세분화했다.


과연 자산세 도입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사에즈와 주크만 두 사람이 미국 최상위 자산가 10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자산세 장기효과 추정치에서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창업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워런 버핏(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등 최상위 자산가 10명이 소유한 총자산은 2018년 현재 7297억달러. 만일 워런과 샌더스 방식의 자산세를 1982년부터 시행했다고 가정할 경우, 이들의 2018년 기준 총자산은 각각 3522억달러와 1640억달러에 그친다. 자산 규모가 지금보다 4분의 1에서 절반 정도로 줄어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자산 소유 집중도를 낮춰 불평등 구조가 다소나마 개선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산세 도입에 대해선 반론도 적지 않다. 2019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산세를 시행하고 있는 곳은 스위스와 스페인, 노르웨이 등 3개국뿐이다. 1990년대에 12개 나라(모두 유럽)가 경쟁적으로 자산세를 도입했던 것과 대비된다.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도 지난해 자산세를 부동산세로 전환했다. 이처럼 유럽 각국이 자산세를 잇달아 폐지한 건 자산가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 재산을 다른 나라로 옮기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웃 나라들 사이에 벌어지는 ‘바닥을 향한 조세 경쟁’이다.

에마뉘엘 사에즈와 가브리엘 주크만이 지난달 펴낸 &lt;불의의 승리&gt;.
에마뉘엘 사에즈와 가브리엘 주크만이 지난달 펴낸 <불의의 승리>.

자산세가 외려 공정성을 해친다는 주장도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다. 유동성이 떨어지는 자산만 쥐고 있을 뿐 소득은 거의 없는 계층에겐 자산세가 과중하고 불공정한 부담이 된다는 게 주된 논거다. 비싼 토지나 주택을 소유한 은퇴자들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에서 자산세 폐지에 이르게 된 배경도 적은 연금소득으로 생활하는 자가 보유 은퇴자들의 불만과 정치적 압력 행사였다. 자산세를 직접세로 볼 것이나 아니냐도 변수다. 미국 헌법은 직접세를 부과할 경우엔 연방에 가입한 각 주의 인구수에 비례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까닭에, 자칫 위헌 소지를 불러올 수 있어서다.


‘물리느냐 마느냐’ 아닌 ‘어떻게’가 쟁점


그럼에도 최대한 많은 세수를 확보하는 데 유리할뿐더러 자산 불평등 억제 효과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자산세는 미국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공산이 크다. 미국은 영국 식민지 시절이던 1776년 이전에도 이미 금융자산을 포함한 사적 소유 재산에 일괄적으로 세금을 물린 역사적 경험을 간직한 나라다. 토지에만 세금을 물리던 당시 식민모국 영국과도 다른 길을 걸었던 셈이다. 누진적 자산세 도입으로 ‘불평등한 유럽’에 대한 저항으로 탄생한 미국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도 계속 끓어오르는 중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표지로 내세운 &lt;이코노미스트&gt; 최신호.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표지로 내세운 <이코노미스트> 최신호.

현재 거론되는 자산세 안이 개별 거주자가 소유한 국내외 자산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상 실패로 끝난 유럽의 자산세 경험과는 맥락이 조금 다른 셈이다. 자산세를 피하고자 거주지를 다른 나라로 옮기거나 자산을 국외로 빼돌릴 유인이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 있어서다. 실제로 워런 후보의 안에 따르면, 미국 시민권자의 국내외 자산 모두가 과세 대상일뿐더러, 세금을 내지 않으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사람에겐 일종의 ‘이탈세’(출구세)를 물린다. 이 밖에 정보통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숨겨진 세원을 파악하는 과세당국의 역량이 예전보다 많이 늘어났다는 점도 자산세 제도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다.


독립 연구기관인 애스펀연구소는 지난 9월 펴낸 ‘부자에게 세금을’(Taxing the rich)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자산세뿐 아니라 소득세 최고세율 대폭 인상, 금융거래세 등 여러 선택지의 장단점을 꼼꼼하게 짚었다. 현재와 같은 불평등 구조를 떠안고 2020년대를 맞이할 순 없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부자에게 세금을 물리느냐 마느냐는 더는 쟁점이 되지 않는 분위기다. 논쟁의 무게중심은 이미 ‘어떻게’로 빠르게 옮겨가는 중이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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