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시민 주도 ‘참여형 연구개발 모델’

삶의 질 개선부터 시스템 전환까지
사회문제 해결 플랫폼 역할 ‘톡톡’

시니어리빙랩·에너지전환리빙랩…
고령화·기후위기 등 협업으로 접근

리빙랩이란?

리빙랩은 살아 있는(living) 실험실(lab)이라는 뜻으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연구자가 시민들의 삶의 공간으로 들어가 사용자와 함께 현장 중심의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개발 방법론이다. ‘일상생활 실험실’, ‘우리 마을 실험실’이라고도 불린다.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개발사업(R&D)이나 사회혁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새로운 ‘개방형·참여형 혁신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다.

시니어리빙랩에 참여하고 있는 시니어 평가단 어르신들이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에서 고령자용 어깨 재활운동 기구의 사용성 평가를 하고 있다.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 제공
시니어리빙랩에 참여하고 있는 시니어 평가단 어르신들이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에서 고령자용 어깨 재활운동 기구의 사용성 평가를 하고 있다.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 제공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 정덕영 부관장이 전해준 일화 한 토막. 2017년 초, 한 벤처기업에서 노인용 지팡이를 들고 체험관을 찾아왔다. 제품 개발을 마치고 양산에 들어가기 직전 “체험관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의 반응을 보고 싶다”며 ‘감수’를 요청했다. 위치정보시스템(GPS)과 엘이디(LED) 램프 등이 장착된 첨단 제품이었다. 어르신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노인들은 악력이 약한데, 손잡이가 너무 얇아서 잡을 수가 없다’, ‘노인들은 대부분 일찍 자는데 조명이 왜 필요하냐’ 등 다양한 지적을 쏟아냈다. 지팡이에 여러 첨단 기능을 넣다 보니 값이 비싸진 것도 문제였다. 결국 해당 업체는 어르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불필요한 기능은 빼고 고령자의 신체·인지적 특성을 더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품을 개선했다.


정덕영 부관장은 “첨단 기능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사용자들의 신체 특성이나 생활패턴을 간과한 게 문제였다”며 “제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어르신들의 의견이 반영됐더라면 이런 시행착오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일은 그가 사용자 참여형 연구개발 모델인 ‘리빙랩’이 왜 필요한지 확신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리빙랩에선 사용자가 제품의 기획 단계부터 개발, 평가에 이르까지 전 과정에 참여해, 연구자 및 개발자와 함께 협업을 한다.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은 그즈음 체험관의 연구 인프라를 활용해 ‘시니어리빙랩’을 막 출범시킨 터였다.


리빙랩의 운영 원리 리빙랩의 핵심은 사용자(시민) 참여다. 시니어리빙랩에는 체험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모집한 ‘시니어 평가단’이 있다. 현재 350명가량이 활동 중이다. 이들이 체험관 입주 기업을 비롯한 동반협력기업, 체험관 안팎의 연구자들과 함께 리빙랩을 이뤄 고령친화 제품 및 서비스를 만들어 간다. 시니어 평가단은 제품 기획 단계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수요조사에 참여한다. 개발 단계에서는 제품 콘셉트와 디자인 평가, 시제품의 사용성 평가 등에 참여한다. 리빙랩이 본격 가동된 2018년부터 지금까지 자세 변환 전동침대, 인지능력 향상 앱, 고령자 보행보조 로봇 등 37건을 개발했다. 시니어리빙랩은 최근에는 체험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어르신들이 실제 거주하는 지역사회로 들어갔다. 그동안의 리빙랩 경험을 기반으로 ‘실험실’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성남시와 함께 진행한 치매안심마을 시범서비스가 그것이다. 이 사업에는 성남시와 체험관 외에 보건소, 치매안심센터, 고령친화 제품을 만드는 기업, 을지대 간호학과가 참여했다. 리빙랩이 민·산·학·연·관 협력모델로 발전한 셈이다.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시니어리빙랩은 리빙랩이 ‘플랫폼’으로 진화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리빙랩 플랫폼이 구축되면 성공 사례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지속성 있게 혁신을 이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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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랩은 일반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전문가가 먼저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수평적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신뢰 관계가 구축되기 전까지는 ‘전문가들이 자기 일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분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다는 연구자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만나고 그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야간 작업자 안전장비 개발을 위한 리빙랩에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참여한 경험이 있는 성태현 한양대 교수(전기·생체공학부)의 말이다. 성 교수는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60여차례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리빙랩의 역사와 현황 리빙랩은 2004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윌리엄 미첼 교수가 처음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미첼 교수는 한 아파트에 정보통신 기기와 센서를 설치해놓은 뒤 지원자들을 모아 살도록 했다. 사람들이 기술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실시간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플레이스랩’이라는 이름의 최초의 리빙랩 프로젝트다. 기술 개발 과정에서 사용자 참여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진일보하긴 했으나, 미첼 교수의 실험에서 사용자들은 혁신의 주체라기보다는 관찰 대상에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다.


리빙랩은 유럽으로 건너가 온전히 꽃을 피웠다. 유럽에선 리빙랩이 처음부터 ‘사용자 주도의 사회혁신’을 추구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시작됐다. 2006년에는 유럽의 19개 리빙랩이 모여 ‘유럽 리빙랩 네트워크’를 꾸렸다. 지금은 400개가 넘는 리빙랩이 운영 중이다. 유럽에서 리빙랩이 활성화한 것은 유럽연합(EU) 차원의 과학기술혁신정책과 무관치 않다. 유럽연합은 2010년대 들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사회에 책임지는 연구와 혁신’, ‘임무지향적 혁신정책’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책들은 혁신의 방향성과 가치지향성을 강조한다. ‘빠르고 많은’ 혁신이 아닌,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혁신을 지향한다. 또 여기에서 다루는 문제는 기후위기, 고령화와 같은 난제들이다. 따라서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협업이 필수다. 사용자 주도형 혁신 모델인 리빙랩이 유력한 방법론으로 떠오른 이유다.


일본에서는 ‘초고령사회의 도래’라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리빙랩이 주로 활용되고 있다. 고령인구 비율이 낮았던 시기에 형성된 주거·교통·의료 등의 시스템을 어떻게 초고령사회에 맞게 바꿔 나갈 것인지 해법을 모색하는 방안의 하나로 리빙랩이 여러 지역에서 운영 중이다. 일본에서는 특히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초고령사회에 맞는 이동시스템 구축과 관련된 리빙랩에는 도요타 등 자동차 업체뿐만 아니라 정보통신기술, 건설 업체들도 참여한다. 고령화를 위기이자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사회문제 해결형 기술개발사업’을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지금은 과기부를 비롯해 산업통상자원부(에너지기술 수용성 제고), 국토교통부(스마트시티) 등 중앙부처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지역재생)에서도 리빙랩이 운영되고 있다.


전환 전략으로서의 리빙랩 사회운동으로서의 리빙랩은 과학기술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는 ‘전환적 혁신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전환적 혁신정책은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려면 사회·기술 시스템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면 화석에너지 중심의 생산·소비 시스템을 재생에너지 기반의 분권화된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고, 고령화에 대응하려면 보건의료 시스템을 ‘치료’에서 ‘예방과 돌봄’ 위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성지은 연구위원은 “리빙랩은 이와 같은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한 혁신 실험 공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실험들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국내에선 서울 동작구 성대골의 에너지 전환 리빙랩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2011년부터 ‘에너지 자립마을’ 운동을 펴온 성대골은 2016년 에너지 전환을 위한 리빙랩을 시작했다. 미니태양광 보급 운동을 비롯해 마을 단위에서 다양한 에너지 전환 실험을 해오고 있다. 성대골 리빙랩에서 이런 실험을 주도하는 이들은 주민 중에서 위촉한 ‘마을 연구원’들이다. 성대골이 시민 주도 리빙랩의 성공 모델로 첫손에 꼽히는 이유다. 김소영 성대골 에너지 자립마을 대표는 “우리 마을의 에너지 리빙랩은 다양한 주제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탄소 배출 제로’ 사회를 위해 분위기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이종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jk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53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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