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2010-05-25
주말이면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와 함께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딸기가좋아’를 찾곤 했다. 각종 캐릭터가 어우러진 알록달록한 놀이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아이를 만족시키고 나면, 지하로 가서 재기발랄한 단편 만화영화를 보면서 내 상상력을 재점검했다. 바로 옆 ‘쌈지미술창고’에서 아이와 함께 그리기와 만들기에 열중하기도 했다.
우리의 그 상상력 넘치던 주말은 패션가방으로 유명한 ‘㈜쌈지’ 덕이었다. 쌈지의 창업자이자 당시 대표이사이던 천호균씨는 ‘시를 쓰듯 경영한다’면서 문화예술과 기업경영의 결합을 시도했다. ‘딸기가좋아’는 물론, 서울 인사동에 복합문화유통공간 ‘쌈지길’을 만들고, 쌈지아트스페이스를 운영하고 록페스티벌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을 여는 등 문화예술에 많은 투자와 지원을 했다.
그 쌈지가 지난 4월 부도를 맞았다.
쌈지는 신화였다. 2000년대 초 이후 백화점과 패션거리에 본격 등장한 “쌈지”(Ssamzie) 가방은 외국 브랜드가 장악하던 패션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튀는 색감은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다. 토종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자체 브랜드로 수출까지 늘려 갔다.
쌈지는 사회적 투자와 실험도 이어갔다. 처음 실험은 문화예술과의 결합을 통한 마케팅으로 시작됐다. 세계적 행위예술가 낸시 랭을 아트디렉터로 영입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지원하는 등 문화예술 관련 사회공헌활동을 공격적으로 펼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험은 사회문제 해결과 예술을 접목하는 데로 옮겨갔다. 쌈지는 사회적 기업과 손을 잡고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유통시키기도 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착한가게’를 열고 패션제품과 친환경 유기농 바른먹거리 제품을 함께 팔기도 했다.
세계적 브랜드 전문가인 데이비드 아커는 “명쾌하고 일관되게 구축한 브랜드야말로 엄청난 자산”이라고 말했는데, 그 명쾌함과 일관됨에서 쌈지라는 브랜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쌈지의 부도 소식은 더욱 안타까웠다. ‘쌈지’는 경제적 성공에다 예술적 세련됨에 사회적 가치까지 얹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훌륭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쌈지’ 브랜드 17종이 사라지지 않고 사회적 기업인 ‘고마운손’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단순한 영리기업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기업이라 더욱 반갑다. 고마운손은 에스케이에너지, 보건복지가족부, 열매나눔재단이 함께 투자·후원해 만든 기업이다. 인력의 절반을 장애인·고령자·새터민으로 채워 취약계층의 자립을 돕겠다는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 패션잡화 생산업체다. 과거 ㈜쌈지 제품을 납품하던 처지에서 브랜드의 주인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부도 뒤 일부에서는 쌈지의 ‘꿈꾸는 경영’을 비난하기도 했다.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너무 많은 꿈을 꾸며 자원을 낭비해 기업이 망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꿈이 없는 기업가는 장사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이 스스로 억만장자가 되는 꿈이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꿈이냐다. 쌈지는 소비자와 예술과 사회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어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꾸었다. 2008년 한겨레경제연구소가 공동주관한 ‘사회적 기업가 아카데미’에서 특강 연사로 나서 수백명의 사회적 기업가들에게 꿈을 불어넣던 천호균 당시 대표이사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도 기업이 부도났으니 굳이 실패라고 부르자면, 성공적 실패다. 기업은 쓰러졌으나, 그 꿈과 사명은 남았기 때문이다.
주식회사 쌈지는 부도를 맞았지만 브랜드 쌈지는 사회로 돌아왔다. 경제적 성과와 사회기여를 동시에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이 소유권을 갖게 된 것은 새 기회가 될 수 있다. 꿈꾸는 브랜드 ‘쌈지’를 통해 윤리적 소비와 사회적 기업이 더욱 커지고 ‘착한 경제’가 확대되는 꿈을 꾸어 본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timelas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