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행복해야 좋은 제품”
첨단 자동화설비 갖추며 직원이 할 몫 남겨둬
인력감축 판단 설땐 공장인수 등 확장 자제
» 피엔(PN)풍년은 ‘직원 만족’ 경영을 통해 55년 전통을 이어온 장수기업이다. 풍년의 한 직원이 지난 9일 경기 안산시 공장에서 레이저를 이용해 압력솥에 글자를 새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안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은퇴 이후 계획이라고 할 것 뭐 있나. 얼마 전에 서울 개봉동에 여섯 가구가 사는 빌라 하나 샀어. 월세 받으며 사는 거지. 경비 자리라도 하나 생기면 좋은 거고.” 풍년 밥솥 생산라인에서 알루미늄 녹이는 일만 30년을 했다는 그다.
“재산이라면 화성에 땅 2000평 있고, 아파트 두 채 있네요.” 올해 25년차 맹만호(56)씨의 이야기다. “제가 15년 전 데려온 친구가 있는데, 땡전 한푼 없이 와서 얼마 전에 34평 아파트를 샀어요. 여기서는 일만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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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회사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고용 안정입니다. 직원들이 행복해야 좋은 제품이 나오고, 소비자들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장동인 제조부문 이사의 이야기다. 풍년의 생산라인은 적정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구조로 되어 있다. 첨단 자동화설비도 갖췄지만, 사람이 해야 할 몫은 언제나 남겨 뒀다. 손주물 압력밥솥 공정이 대표적이다. 알루미늄 용해액을 주물 틀에 쏟아붓는 일은 기계로 자동화할 법도 한데, 절반 이상을 사람의 손을 거치고 있다. “사람 손이 가야 밥솥 두께 조절이 제대로 된다”는 말에서는 사람에 대한 애착이 느껴졌다.
풍년은 전씨와 같은 정년퇴직자를 해마다 서너 사람씩 꾸준히 배출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긴다. 아이엠에프(IMF) 때 56살로 낮췄던 정년을 3년 만에 58살로 되돌린 회사다. 이런 철학은 퇴직자의 재고용으로 이어진다. 물류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방홍구(74)씨는 퇴직 후 6년 만에 회사 일을 다시 맡은 뒤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방씨는 “늦게 얻은 딸이 있는데, 딸이 클 때까지 일하라면서 회장님이 다시 불러 주셨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풍년은 언뜻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 회사다. 매해 300억원대 매출에 1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꾸준히 올리고
있지만 10년째 비슷한 상황이다. 장동인 이사는 “5~6년 전에 다른 공장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다”면서도 “신중한 검토 끝에 거부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잘한 일”이었다고 했다. 만약 잘못됐으면 해당 사업장의 인력을 인위적으로 줄여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여러 차례 재무적 투자
제의도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고 한다. 국외진출도 마찬가지다. 아이엠에프 직후에 중국에 외주 형식으로 잠시 공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 제품 질도
맞추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국내 인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2년 만에 철수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자신들을 아껴주는
회사에 성실함으로 보답했다. 회사 일과는 아침 8시10분에 시작되는데, 직원들은 대부분 7시면 출근을 완료한다. 1시간 동안 회사 안팎을
정리한다. 풍년의 생산라인은 정갈함 그 자체였다. 풍년 임직원의 평균 근속연수는 14.6년. 생산직은 19.6년에 달한다. 비슷한 규모의
중소기업 평균 근속연수(7년)의 2배 이상이다.
풍년의 경영에는 직원 만족을 넘어 ‘직원 행복’을 추구하는 고집이 있었다. 풍년은 현재 독일의 휘슬러와 프랑스의 테팔 등 선진국 제품과 경쟁할 수 있는 프리미엄 제품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경아 홍보실장은 “올해는 세광알미늄에서 피엔풍년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해 종합 주방가전업체로 발돋움할 예정”이라며 “내년엔 국내 유명 디자이너와 함께 프리미엄급 주방기기 ‘디자이너 컬렉션’(가칭) 에디션도 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풍년 임직원들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품질에 대해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애프터서비스를 나가면 주부들이나 식당 주인들이 10년간 썼던 밥솥을 내놓으며 ‘앞으로 10년 더 써야 하니 잘 고쳐달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저희 제품은 20년은 쓴다는 거죠. 저희들이 신제품을 만들 때 최우선에 두는 가치가 ‘이 정도의 신뢰를 다시 받을 수 있는 제품일까’를 고민합니다. 그에 부합하지 않는 제품은 만들 수가 없는 거죠.”(장동인 이사)
아이엠에프 이후 사라져버린 ‘평생고용’의 소중함, 노동강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고객 만족’의 참뜻이 이곳에서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직원 만족이라는 고집 속에서.
안산/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미국식 주주중심경영 휘청평생고용 시스템 다시 주목
풍년이 채택한 경영시스템의 핵심은 ‘평생고용’(lifetime employment system)이다. 평생 동안 한 기업에서만 일하며 살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시스템이다.
평생고용시스템을 기업 입장에서 해석하면, 효과적인 인적자원관리전략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평생고용을 통해 숙련된 좋은 인력이 빠져나가지 않게 함으로써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업이 누군가를 새로 고용해 업무를 맡기고 나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은 업무 수행 과정에서 그 기업에 특화한 업무 지식을 얻게 된다. 이런 사람이 떠나면 기업은 그 지식까지 잃어버리게 되므로, 근속을 장려해야 한다.
평생고용은 오래 일할수록 임금을 많이 받는 호봉제 임금제도와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이 제도 아래서는 생산성이 높은 젊은 시절에 받을 인센티브를 아껴뒀다가 경력이 올라가면서 받는 효과와, 단기근무자의 임금을 장기근속자가 대신 받는 효과와, 미래 현금흐름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장기근속 동기가 높아져 이직률이 떨어진다.
일본 기업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1980년대 후반 이후, 평생고용체제는 ‘일본식 경영’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학계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투자자가 주도하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득세하면서, 평생고용은 경영환경 급변에 대처하기 어려운 경직성 등 여러 비판에 직면한다. 실제로 평생고용의 대표주자이던 한국과 일본에서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와 ‘잃어버린 10년’의 불황을 각각 겪으면서 이 체제가 흔들리게 된다.
최근 주주만이 아닌 환경, 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두루 고려한 ‘지속가능경영’이 세계적 경영 흐름으로 자리잡으면서, 평생고용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고 있다. 지속가능경영에서 임직원은 주주와 맞먹는 이해관계자다. 주주가치 상승을 위해 임직원을 우선 해고하는 주주중심경영 관행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평생고용은 ‘평생학습’을 통해 노동자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며 진화하고 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timelast@hani.co.kr